▲뒤짝지 몽돌 해수욕장 겨울에는 파도에 몽돌 구르는 소리로 인하여 잠을 설친다.
이재언
1993년 5월 13일 이곳을 처음 방문하여 하룻밤을 지낼 수 있었다. 그 뒤 여러 번 흑산도를 가면서 그냥 지나치다가 2012년 봄, 필자가 19년 만에 다시 찾은 다물도는 섬의 외양부터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종선으로 갈아타고 섬 안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면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듯한 섬의 품 안으로 포근히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섬은 대개 그 형상이나 빛깔 등 형태에서 비롯되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다물도의 경우는 다르다. 다물도를 둘러싼 바다에는 봄과 여름에 난해성 어족이 많이 모여들어 여러 종의 고기가 잡힌다. 천혜의 어장을 갖고 있는 이곳은 해산물이 풍부하다 하여 다물도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포구에 다가갈수록 잘 지어진 집들과 크고 작은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어 한눈에도 부자섬 임을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다물도 주위는 어종이 풍부하여 고기가 잘 잡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고기를 양식하는 가두리 양식장도 배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곳은 잡는 어업과 기르는 어업이 성행한 곳이다.
다물도는 물산(物産)에 있어 흑산군도 중 으뜸으로 치는 섬이었다. 이웃섬 흑산도의 명성에 눌려 일반적으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기실 흑산도가 본격 개발되기 이전인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물도는 서남해에서 속칭 가장 잘나가던 섬이었다.
흑산항은 허허벌판이어서 겨울철 북풍에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방파제가 없지만, 다물도는 겨울철 북풍을 막아주는 천혜의 요건을 갖추고 있어, 1960년대 다물도 항에는 수백 척의 조기잡이 배들과 안강망 중선 그리고 홍어 잡이 배들이 모여드는 중심을 이루었다 한다. 그 덕분에 목포에서 흑산도를 오가는 여객선들이 화물을 가장 많이 하역하는 경유지이기도 했다. 그만큼 다물도는 부자마을이었다.
1960~1970년대 대부분의 섬들은 농토가 적고 인구가 많은 관계로 보릿고개가 닥칠 때마다 기아에 허덕이며 살았지만, 다물도는 흑산면 11개 섬 중에서 가장 배고프지 않게 살아간 섬이었다. 당시에는 흑산도나 홍도가 다물도 덕분에 생계를 꾸릴 만큼 평범한 섬에 불과했다는 60대 한 섬주민의 회고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다물도는 부자마을... 홍어 잡이의 근거지다물도는 홍어 잡이의 근거지였다. 무동력선(멍텅구리배) 수백 척이 만선을 이루며 내항에 홍어를 내려놓던 당시에는 흑산도 홍어라 불리지 않고 다물도 홍어로 불렸다. 이런 호황에 힘입어 주민들은 너나없이 목포에 집 한두 채씩을, 이웃 큰 섬엔 논밭을 사놓기도 했다. 그 뒤에 홍어 값의 폭락, 인건비, 홍어 어장이 점점 쇠퇴했고 어장이 풍요로웠던 다물도의 명성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고 만 것이다. 홍어 어장이 사라져가자 섬사람들은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한 자구책으로 가두리 양식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초창기에는 호황을 누렸으나 국내 양식업의 난립과 함께 중국산 활어의 수입으로 큰 타격을 입어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내항 바깥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가두리 양식장은 섬의 주된 경제수단이기는 하나, 지금은 섬사람들의 주름살이자 애물단지가 되었다. 5년 전에는 정부의 가두리 양식장 축소정책에 따라 규모가 예전의 3분의 1수준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