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목대피소
유혜준
걷는 속도가 현저하게 줄었다. 지금 그 자리에서 더 걷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이 지치면 더불어 몸도 지쳐 걸음도 더뎌지는 법. 사위는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다. 빗줄기는 굵어졌고, 바람 역시 세차게 불었다.
이따금 길 위에서 쉬었다. 쉬는 간격이 짧아진다. 쉴 때마다 한형이 오나 싶어 뒤를 돌아봤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숲 어디선가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두어 명의 남자가 내가 걸어온 방향으로 나를 지나쳐 갔다. 아니 어쩌면 서너 명이 넘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이 밤을 세석에서 묵을 작정인가 보다.
산길 3.4km는 길고 멀었다. 걷고 또 걸어도 걸어야 할 거리는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제자리 뜀뛰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빗줄기는 굵어졌다가 가늘어지기를 반복했고, 나는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길은 결코 걷기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비를 흠뻑 맞으면서 걷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말을 이런 때 하는 건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을 것 같던 길이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조금씩 줄었다. 장터목대피소가 400미터 남았을 때, 길 반대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브, 올리브."남편은 언제부터인가 나를 닉네임인 올리브로 불렀다. 남편이 나를 부르는 호칭 때문에 화개재에서 만난 한형이 "두 사람은 대체 어떤 관계지?" 하는 생각을 했더란다. 아내를 닉네임으로 부르는 남자는 거의 없을 테니까. 나는 남편을 닉네임으로 부르지 않는다.
일찌감치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한 남편은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면서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단다. 연하천대피소에서 만났던 다섯 남자들 역시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해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인데도 장터목대피소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고 했다.
그들은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인 뒤에도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남편에게 자꾸 물었더란다. 왜 안 먹느냐고. 술을 권해도 거절하면서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나. 나중에 그들이 해준 얘기다. 나 역시 장터목대피소에 일찍 도착한 남편이 저녁식사 준비를 다하고 나를 기다릴 것으로 예상했다. 어쩌면 마중을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는데, 내 예상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