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이 민주당 홍익표 의원의 '귀태'발언을 이유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예비열람 등 원내 일정을 전면 취소한 가운데 민주당 정성호 원내수석부대표와 기록물 열람 위원인 홍익표·박범계·박남춘·전해철 의원이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운영위원장실에서 새누리당 열람위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남소연
민주당의 사과, 과연 옳은가
과정은 복잡했지만, 결국 정리하면 민주당은 귀태 파문에 대해 제대로 따져보지도 못한 채 '스스로' 완패를 선언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야당이 그런 말도 못 하냐"며 목청을 높일 만한데 미묘한 유교적 관점에서의 비난 가능성으로 그저 쩔쩔매다가 결국 고개를 숙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홍익표 의원은 원내대변인 자리를 내놓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김한길 당 대표는 청와대와 새누리당을 향해 사과했다. 명분은 원만한 국정조사를 회복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른바 '귀태'와 관련한 사과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새로운 출발임을 알리는 신호탄'임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해찬 의원의 15일 발언에 대한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반응이 그것이었다. 이해찬 의원이 민주당 당원 행사에서 "(국정원과 단절해야) 당신(박 대통령)의 정통성이 유지가 됩니다. 자꾸 비호하고 거짓말하고 하면 오히려 갈수록 당선 무효까지도 주장할 수 있는 세력이 자꾸 더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두고 이를 '막말'이라고 주장하며 다시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당 인사의 발언 하나하나를 문제 삼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부모를 누군가가 비난한다면 이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 맞다. 1980년대 초반에 초등학교를 다닌 기자의 경험도 그러하다. 당시 같은 반 학생이 싸우면 선생님은 야단치면서 "네 부모님 욕하는 것 아니면 싸우지 마라"고 훈계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벌어진 귀태 논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지극한' 효녀 딸을 두어서 행복할지 모르겠지만, 공인으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존재에 대해 그 누구도 함부로 비판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존엄'으로 등극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양면이 존재하는 공인이다. 그의 생전 업적에 대해 누군가는 기념관까지 지어가며 추앙한다. 또한 특정 정당과 지역에서 그는 사후에도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공인으로서의 존재감을 가진 그에 대해 생각이 다른 누군가는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민주국가라면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무슨 문제냐며 말할지 모르지만, 그가 일제 치하에서 보여준 친일 행각과 이어진 군사쿠데타를 통한 권력 찬탈 역시 결코 그를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가족관계 틀 속에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외국 언론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독재자라 부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에 '귀태' 파문 과정에서 이러한 비판의 자유가 결정적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민주당 현 지도부가 '귀태' 파문을 조속히 매듭 짓자며 너무나 쉽게 사과해 버린 일이다. 사실 이 사과를 통해 문제가 봉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과정으로 진입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매우 중요한 권리, 즉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해찬 의원의 발언에 대해 재차 기세 등등한 목소리로 집중 포화를 날리는 새누리당과 청와대의 언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청와대 이정현 수석은 야당을 향해 "민주당이 대선 무효 협박을 하고 있다"며 대선 결과 불복 여부에 대해 공식입장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황당한 것은 이에 대한 민주당 지도부의 반응이다. 이미 확인된 부정선거의 사실마저도 강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은 대선에 불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정상적인 국정 운영에 불복하는 것입니다."100전 100승. 새누리당이 원하면 그 방향대로 들어준다는 비아냥이 국민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처럼 정치적 타협을 통한 '파문 확산 차단'에 대해 민주당 지도부는 "국정원 국조는 옥동자다. 사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천만의 말씀이라고 반박하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다.
민주당 지도부, 지지자 믿고 야성 회복해야'국정원 국조'는 결코 옥동자가 아니다. '국정원 국조'야 말로 진짜 '귀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권력형 부정 선거가 벌어졌고 이러한 부정 선거의 진실을 밝혀야할 책임이 있는 경찰이 재차 은폐, 조작을 통해 부정선거를 완성시킨 사건이 바로 지난 대선 과정에서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권력 부정선거의 수혜자인 현 정부 연관성을 포함하여 진실을 밝히자고 추진되는 이 국정조사는 사실 태어나서는 안 될 '귀태', 그 자체인 것이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국민적 의혹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스스로가 진실을 밝히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지금 형국은 오히려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밝혀진 사실에 대한 확인 사살'을 언급하며 가해자를 압박해야 하는데 의도적으로 이를 회피하고자 별별 시비를 다 거는 가해자에게 사정해서 조사에 임하는 모양새가 되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분명히 말하건대 진실은 사정하고 빌어서 얻을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조사는 쉽게 말해서 '기세 싸움'인데 이미 기울어버린 이 상태에서 과연 어떤 방법으로 무슨 진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지 적지 않은 시간동안 '국가기관의 조사관으로 일해온' 기자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가해자 '의혹'을 받고 있는 새누리당은 자신들이 싸우기에 부담스러운 상대방 선수마저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는 황당한 주장도 거침이 하고 있다. 마치 장기를 두는데 '차', '포'를 모두 포기해야 장기를 시작하겠다는 식의 주장이다.
문제는 장기를 이기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상대방이야 무슨 주장이든 할 수 있는데 이를 요구받은 당사자가 보이는 무력감이다. 정상적인 판단이라면 이같은 야비한 요구에 대해 부당함을 항의하며 국민에게 함께 싸우자고 호소해야 한다. 정 안 되면 '장기판을 들어 엎는' 용맹성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다는 점이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장기를 두고 말겠다는' 목적 외에는 무슨 전략이 있는지 묻고 싶다.
묻고 싶다. 과연 그렇게 해서 장기를 두면 이길 수 있다고 보는가. 정말 새누리당이 요구하는대로 김현 의원과 진선미 의원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 사퇴시키고라도 꼭 장기를 두라고 요구한다고 보는가.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지난번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표들이 다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힘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청와대의 의중에 따라 벌어진 이번 귀태 논란 과정에서 새누리당과 청와대가 얻은 이익은 적지 않다. 우선 '우리 사회에도 존엄은 있다'고 생각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어쩌면 최고 존엄인 '아버지 박정희'에 대해 민주당이 더 이상 비판하지 못하도록 확실한 명분과 관행을 마련한 것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다가오던 '부정선거 수혜' 시비에 대해 공세를 차단시키고 이러한 매개체가 될 수도 있는 국정원 국조를 사실상 '이미' 무력화 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지도부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민망할 정도다. 결국 17일 오전, 민주당 지도부는 스스로 옥동자라 칭한 '국정원 국조'를 한다며 새누리당의 요구대로 김현-진선미 의원을 사퇴시키고 말았다. 과연 이것이 옳은가. 귀태 파문에 이어 야당 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발언을 한 이해찬 의원의 연설에 대해서도 또 다시 논란이 불거질까 두려워만 하고, 그래서 대선 불복이 아니라며 이정현 수석의 물음에 답해주는 민주당 지도부를 보며 이 나라 야당 지지자들은 누굴 믿고 싸울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