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동안 샤넬이니 구찌니 프라다니 하는 명품의 세계와는 만날 일이 없었다. 그들 브랜드의 로고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왜 명품매장에 지원했냐고? 구직자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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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판매였다. 물건 파는 사람이 자신이 파는 물건에 대해 무지했다. 몰라도 '너~무'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패션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결혼 전에는 여동생이 사온 옷을 내 옷인 것처럼 입었다. 여동생이 먼저 출가한 후엔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는 그가 남기고 간 정장들을 챙겨 입고 평소에는 청바지 등 편한 옷들로 생활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몸무게가 불었지만, 한때 나보다 통통했던 여동생에게 감사하면서 그 옷들을 계속 입었다. 그래서 우리집 장롱 속엔 10년 가까이 된 옷들이 많다. 그만큼 디자인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보풀이 심한 심각한 옷들도 많다. 그러면 어떠랴. '옷은 입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가 내 신조였다. 한 마디로 나는 '패션 테러리스트'였다.
그러니 샤넬이니 구찌니 프라다니 하는 명품의 세계와는 만날 일이 없었다. 그들 브랜드의 로고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왜 지원했냐고? 구직자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 관심이 있든 없든 우선 일자리를 얻는 게 중요하지. 또 모르니까 더 궁금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가방을 들까. 도대체 명품이 뭐기에 카드빚을 내면서까지 사람들이 살까. 궁금증의 답을 찾고 싶었다. 그와 함께 멋지게 꾸민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나도 패셔니스타는 못 돼도 '패션꽝'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도 기대했다.
우선 우리 매장을 찾는 손님들을 유심히 봤다. 선물을 사러 온 사람이 많았다. 한 부부는 결혼 1주년을 맞아 서로에게 선물하는 거라면서 매장을 한참 돌아본 후 셔츠와 신발을 각자에게 선물했다. 두 사람이 함께 엮어온 1년이 상상될 정도로 둘은 다정했다. 한 40대 남성은 어머니 생신이라면서 가방을 골라달라고 했다. 혜수 언니는 어머니 연령대를 묻더니 기본적인 토드백을 추천했다. 가방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그 남성의 얼굴에 선물 받고 좋아하실 그의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사간 제품의 가격 태그(TAG)에 찍힌 숫자와 상관없이 그들은 신중했다. 그들을 보면서 명품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에서 다소 벗어났다. 그들을 모두 '속물'이나 '허영 덩어리'로 매도할 수는 없었다.
우리 매장에는 단골도 많았다. 매니저가 같은 매장을 10년 넘게 꾸려온 덕택이다. 단골들은 백화점 문화센터나 VIP라운지에 오갈 때 매장에 들려 커피를 갖다 주고 수다를 떨다 가기도 했다(매장 내에서 음식 섭취는 불가였지만 다들 몰래 요령껏 섭취했다, 그런 일탈마저 없었다면 백화점 생활은 더 삭막했을 것이다, 그러다 서비스 리더에 걸리면 다시 불행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니 단골 파악이 쉬워졌다. 그들은 우리 로고가 박힌 옷이나 가방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명품족은 명품 관리에도 남다르다는 사실도 알았다. 한 단골이 '입고 온 티셔츠가 몇 년 됐을 것 같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난 새 옷처럼 보인다고 답했다. 그래야 그 고객이 좋아할 것 같았고 (내 생각보다 고객의 입장을 따지다니 나도 판매직 다 됐나?) 깨끗해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나의 말에 그가 6~7년쯤 됐다고 말했다. 그는 옷을 입으면 꼭 드라이클리닝을 맡긴다고 덧붙였다.
명품을 입기 위해서는 티셔츠까지도 세탁소로 보내는 꼼꼼함이 필요했다. 핸드백의 관리는 한층 더한 섬세함을 요구했다. 고객들은 백을 살 때부터 스크래치가 없나 가방을 앞뒤로 보고 속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리고선 집에서 보관할 때는 모양을 유지하도록 가방 안에 신문지 등을 넣고 먼지 등이 묻지 않도록 상품에 함께 들어있는 부직포 주머니(더스트백)에 꼭 넣어둔다고 했다. 방수코팅제·가죽전용클리너도 사용했다. 대단한 애착이었다.
"명품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비싼 브랜드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