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탄현면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묘소
이규봉
장준하의 구국장정 육천리장준하 선생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학도병으로 끌려가야만 하는 환경에 놓이자 부인에게 탈출을 암시하고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에 지원했다. 중국 강소성 서주 쓰카다 부대에 배치 받은 후 중경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7월 7일 동료 3명과 함께 탈출한다. 갖은 고생 끝에 임천에 도착하여 중국 중앙군관학교 산하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소하여 소정의 훈련을 마치고 중국군 장교로 임관한다.
11월 30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 등 50여명과 함께 남양과 노하구를 거쳐 새도 넘기 어렵다는 파촉령을 넘어 파동까지 걸어간다. 파동에서는 군함을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1945년 1월 31일 중경에 도착했다. 일행은 시내를 행진하며 임시정부 청사로 간다. 이 사실이 당시 국제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가 강압적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큰 힘을 보탰다.
서주에서 임천, 남양, 노하구, 파동 그리고 중경에 이르는 이 구간의 거리가 6천리 가까이 되어 이를 "장준하의 구국장정 육천리"라 한다. 이 구간을 순례단이 장준하 선생처럼 걷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대신 걷는 것에 가장 가까운 자전거로 따라 가면서 장준하 선생의 그 힘들었던 장정을 몸소 되새겨 보고자 했다고 말한다.
평지 800km와 산 400km를 오르내리다
자전거 순례단은 지난 6월 23일 인천을 출발해 북경을 경유하여 강소성 서주로 갔다. 24일 서주 쓰카다 부대가 있던 현 공정병학원(工程兵學院)을 출발하여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있던 임천제일중학교(臨泉第一中學校)와 중국 중앙군 남양전구사령부가 있었던 남양경제무역학교(南陽經濟貿易學校)를 방문했다. 노하구에서는 장준하 선생 일행이 신세를 많이 진 중국 중앙군 소속 이종인(李宗仁) 부대를 기념하는 역사박물관과 탈진한 장준하 선생을 진료한 복민의원(福民医院)을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