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 하긴스의 '그래피스 119'. 1962년 플럭서스 공연 중 하나로 하긴스, 트로우브리지, 백남준, 보이스, 슈미트, 클린트베르크, 포스텔, 놀즈, 스포에리 등이 참가했다.
백남준아트센터
이 운동은 마치우나스가 1962년 서독 미 공군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게 되면서 그 중심지가 뉴욕에서 비스바덴으로 옮겨졌다. 이곳은 슈톡하우젠을 따르는 전위음악가도 많았고, 이미 실험음악과 행위예술에도 관심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해 9월 비스바덴에서 첫 공연의 닻을 올린다.
회원으로는 음악가인 라 몬테 영·존 케이지·디 히긴스와 알리슨 놀스 부부·백남준·시게코 오노·조지 브레히트·시인 잭슨 맬로·베이스연주자 페터슨·종합예술가 보스텔 등이 있었다. 그야말로 동서가 같이 한 최초의 국제주의 미술운동이다. 회원 중 하벨과 란즈베르기스은 훗날 체코와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뉴욕과 달리 독일과 유럽에선 여러 도시를 순회한다. 9월 독일 비스바덴에 이어 10월에 암스테르담, 11월에 코펜하겐·런던·쾰른·파리 등에서 공연했다. 백남준은 이 단체의 기관지 <데 꼴라주>의 편집도 맡는데 이 책에 나오는 '플럭서스 섬'을 보면 당시 백남준과 그 회원들이 생각한 이상향이 뭔지 알 수 있다.
마치우나스는 1963년 뉴욕 소호에 본부를 창설하고, 그해 "부르주아의 병폐와 지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한 문화를 추방하라"며 "죽은 예술, 모방·인위적 예술·추상적이고 환영적이고 수학적인 예술을 추방하라, '유럽주의'를 추방하라"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발표했고, 196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게시했다.
백남준과 호형호제하던 요셉 보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