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프 마파엘 주한 독일대사가 '독일의 통일 경험'을 주제로 발제를 하고 있따.
원혜영 의원실
독일 통일에 대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시기, 1989~90년의 통일 상황, 통일이후부터 지금까지 상황 이렇게 3단계로 나눠 설명 드리겠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인 1단계 상황에서 중요한 관점은 왜 서방국가들이 평화로운 독일의 통일을 허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독일은 주변국가에 항상 위험요소로 인식됐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이 되었을 때 '통일 독일이 서방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평화로운 국가로 남아있을 것이다'는 신뢰를 주는 정책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도 한반도가 비핵화 될 것인가 하는 논란이 있기 때문에 평화를 위한 주변국가에 대한 신뢰정책이 중요한 것 같다.
통일의 시점이 왔을 때 서방 파트너 국가가 통일에 동의했던 이유는 아데나워 총리부터 분명하게 친서방 정책을 꾸준히 펼쳤기 때문이다. 독일이 제3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확실하게 NATO, EU에 편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둘째 독일이 친서방 정책을 추진했더라도 그것 하나만으로는 통일을 하기 부족했다는 점이다. 친서방 정책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빌리 브란트와 발터 쉘이 독일이 이니셔티브 쥐고 통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동방정책을 추진하게 됐고, 동방정책을 실시한 지 20년 만에 독일이 통일되게 됐다.
빌리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이 성공하게 된 이유는 일관되게 정권교체 이후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20년간 일관되게 긴장완화 정책, 접근을 통한 변화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통일의 빛을 보게 되었다.
신동방정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구권 국가와의 기본전략을 체결하는 것에 대해 당시 국회는 찬반이 50 대 50으로 양분돼 있었는데 새로운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유권자는 빌리브란트가 이끄는 사민당에 표를 몰아줘서 압승하도록 했다. 동방정책이 실현되도록 결정한 주체가 서독 국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합의에 이르다보니 이후에 보수당이 집권하더라도 국민들이 일관되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동방정책을 지지하게 됐다.
동방정책 키워드는 '접근을 통한 변화'성공적인 동방정책도 처음 7년만 놓고 보면 동서 간 갈등을 유발하고, 분단을 고착 시키는 정책이라는 인상을 줬다. 동서독이 유엔에 가입하는 등 동독을 한국가로 인정했고, 유련안보협력회의 진행을 보면 독일이 영구히 분단된다는 인상을 갖게 만들었다. 실제로도 동방정책의 내용을 보면 가장 최고로 추구하는 목표는 통일이 아니었다. 동방정책의 최고 목표는 동구권 국가의 자유와 물질적 부였다. 동서진영의 냉전 완화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이후 콜 총리가 발표한 10개항 프로그램에도 '국가연합'이라는 표현이 있을 뿐 통일이라는 표현은 없었다. 동방정책이 구현되는 동안 키워드는 '접근을 통한 변화'였다. 이 시기에 모든 분야에서 접촉, 교류가 생겨나고 발전됐다.
접근을 통한 변화정책을 추구하면서 서독은 상당한 금액을 동독에 줬다. 대신 동독으로부터 구체적 대가를 받고 줬다. 구체적인 대가에 대해서는 정치적 계산에 의해 가격이 결정됐다. 일례로 '프라이카우프(자유를 산다는 뜻으로 서독의 동독 반체제 인사 석방사업)'는 정치범 한 명당 얼마를 줄 것인가에 대해 정치적으로 계산 됐다. 서독에서 동베를린 도로이용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정치적 결정으로 가격이 높게 책정됐다. 동독은 그 대가로 서독 주민이 자유롭게 여행하게 해주고 동독 주민이 서독에 갈 수 있게 해주었다. 스윙이라는 무이자 차관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서독의 재정 지원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지원이 동독 정권을 고착화하는데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전략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당시 동서독 인적 교류가 굉장히 늘어났다. 1970년에 동서독 간 전화건수는 70만 건에 그쳤는데, 1998년에 2500만 건으로 늘었다. 또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8년 한해만 보더라도 5천명의 동독 사람들이 서독에 갔다. 20년간 동방정책 결과로 동서독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도 큰 혼란이 없었다.
동독 시민들의 '우리는 한민족' 구호가 통일 가능케 해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통일은 하룻밤에 급작스럽게 다가왔다. 핵심은 독일 통일에 대한 결정이 국민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동독 시민들이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면 독일 통일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구호만큼이나 유명한 구호가 '독일 마르크가 우리에게 오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에 가버리겠다' 였다.
이런 상황이 서독 정부 입장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압박이 됐다. 동독 주민의 요구를 들어서 단시일 내에 통일을 하지 않으면 대량 난민사태가 우려됐고, 소련이 국경을 폐쇄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대부분 동독민이 서독으로 떠나오지 않고 동독에 머물게 하기 위해 몇 주, 몇 달의 시간밖에 없었다.
현재 시각에서 보면 그 당시 결정 중에서 쓸데없이 많은 비용을 발생시킨 결정도 있었고, 동독의 경제 살릴 수 있었는데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결정도 있었다. 서독의 제도 특히 사회복지 제도가 동독에 그대로 적용되면서 이후에 많은 통일 비용을 초래하게 됐다. 독일 전체의 통일 비용이 1조 6천억 유로로 추정되는데 1조 유로 정도가 사회복지에 들어갔을 정도로 사회복지 부담이 컸다.
한국이 시간을 두고 여유 있게 통일을 진행한다면 독일보다 비용을 훨씬 줄이는 통일을 할 수 있다. 한반도 통일은 소유권, 사회보장, 화폐통합 등 비용은 줄이면서 대량 탈북사태를 막는 방식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통일 이후의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독일 통일이후 1992년부터 2003년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하지만 2003년에 '어젠다 2010'이 만들어지면서 통일된 독일에서 대대적 개혁을 이루게 된다. 이 개혁 덕택에 통일된 지 25년 된 현재 독일 경제 번영의 계기가 됐다. 통일된 지 20년이 지나니깐 그동안 쏟아 부은 비용보다 받은 이익이 더 크다는 결론이 나왔다.
국민들 사이의 마음속의 내적 통일은 경제적 통일보다 오래 걸리고, 40년간 분단됐으면 그 만큼의 내적 통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사회 – 원혜영 의원서독의 동방정책이 사민당의 빌리브란트에 의해 입안되고 시행됐지만, 이후에 바뀐 정권인 기민당의 콜 총리가 이행을 했고 통일은 기민당 정권에서 결실을 맺었다는 것을 봤을 때 정권의 변화와 상관없이 일관되고 안정되고 지속적인 통일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독일의 이니셔티브가 있었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지, 그 이니셔티브를 포기하고 다른 강대국에 맡겼다면 독일 통일 있었겠느냐는 점은 지금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대북 통일 정책의 일관성, 우리 정부의 이니셔티브 갖기 위한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추미애 "표면적 통일 아닌 동서독 간 조화 눈여겨봐야"지정토론 - 추미애 의원독일 통일은 그냥 통일이 아니고 독일사회의 '통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겉모습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동서독 간의 조화(하모니)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독일인의 철학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