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셜록 홈즈가 있다면, 한국에는 고상만이 있다" <나는 꼼수다> 진행자였던 김어준씨가 한 말이다. 고상만 보좌관은 1998년 김훈 중위 사망 사건을 시작으로 수많은 군 사망사고의 진실을 파헤쳤다.
남소연
"국회의원의 권한을 드릴 테니, 군 인권 문제 개선을 위한 정책과 입법 활동에 저와 함께 하시면 어떨까요?"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김광진 민주당 의원은 지난 2월 설 연휴 '백수' 고상만(43)씨에게 5급 보좌관직을 제안하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고씨는 며칠 동안 고심한 끝에 승낙했다. 김 의원은 "낮은 직급인데도 승낙해줘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고씨는 3월 보좌관 명함을 팠다. 김 의원은 "우리나라에서 군 사망사고 문제에 대해 고상만 보좌관만큼 도와줄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꼼수다> 진행자였던 김어준씨는 "영국에 셜록 홈즈가 있다면, 한국에는 고상만이 있다"고 했다. 고 보좌관은 1998년 '김훈 중위 사망 사건관련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수많은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에 앞장섰다.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담당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조사관 경력을 빠뜨릴 수 없다.
그를 두고 최고의 조사 전문가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군 사망사고 유족들이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바로 그다. 유족들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진다는 고 보좌관은 "169기의 시신과 유골함이 최대 42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각 군 냉동고와 보급 창고에 방치돼 있다, 유족들은 진실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해 달라며 국방부와 싸우고 있다"고 전했다.
오는 9월 유족의 한을 풀기 위한 김광진 의원과 고상만 보좌관 콤비의 첫 입법 성과가 나온다. 고 보좌관은 "자살한 군인은 여전히 '개죽음'이다, 바뀌어야 한다"면서 "국가는 징병제에서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에서 생활하다가 죽은 군인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자살했다면 어떤 부대적 요인이 있었는지 밝혀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예능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의 전우애는 군 병원 냉동고과 보급창고에 잠들어 있는 부하·동료 사병에도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8~2011년 이명박 정부 동안 매년 129명의 군인이 사망했고, 그중 83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 보좌관은 "사흘에 1명씩 군인이 죽는다, 군 사망사고는 과거의 문제이자 오늘의 문제인 만큼 하루 빨리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8일 오전 국회 김광진 의원실에서 고상만 보좌관을 만났다.
[고 김훈 중위와의 만남] "'개죽음'을 군 의문사로 바꿔놓았다"고상만 보좌관이 의문사와 처음 맞닥뜨린 것은 1990년 3월의 일이다.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김용갑 총학생회장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는 "나만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컸고,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와 도망가면 죽은 사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주기 추모제 때 학교를 점거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는 다시 의문사와 마주했다.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죽음이다.
김씨의 동료였던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필했다며 자살방조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고 보좌관은 김기설씨의 자필 명함을 갖고 있었다. 그는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지만, 강씨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대학에서 제적된 상태였던 고상만 보좌관은 곧장 '강기훈씨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들어갔다. 인권운동가의 길에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이후 여러 민주화·인권단체에서 일한 고 보좌관에게 1998년 2월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왔다. 80만 원의 활동비와 점심을 약속했다. 활동비 25만 원을 받고 있던 고 보좌관의 첫 마디는 "그 많은 돈을 어디에다 쓰죠?"였다. 그만큼 대가 없이 인권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천주교인권위의 문을 두드렸다. "형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도와 달라"고 했다. 고 김훈 중위의 동생이었다.
김훈 중위는 같은 해 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GP(경계초소) 벙커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국방부는 자살로 결론을 내렸지만, 고인의 가족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후 판문점 경비대대 대원들이 북한과 내통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김훈 중위의 죽음은 온 나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김훈 중위는 이 부대의 소대장이었기 때문이다.
여론이 들끓자, 국방부는 군 창설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의문사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합동조사단(특조단)을 꾸렸다. 고 보좌관은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그까짓 장교 하나 죽은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요란을 떠느냐'는 국방부 모 대령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특조단의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고 보좌관은 "이후 15년 동안 대법원,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국가권익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가 모두 유족의 손을 들어줬지만, 군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면서도 "김훈 중위의 죽음을 둘러싼 싸움은 군대에서의 '개죽음'을 의문사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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