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실의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책 표지
창비
마트료시카 인형 저 안쪽의 작은 아이를 만나려면 수많은 중간 단계를 거치는 수고가 필요하다. 고학년에서 저학년으로, 그리고 글로 된 동화에서 그림책으로 내려가는 과정은 마트료시카 인형을 하나씩 열어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혁아, 어서 먹어."엄마가 장조림을 손으로 찢었다. 오빠 숟가락에 얹어 주었다."나도."숟가락을 내밀었다."너는 찌개랑 먹어. 아무거나 잘 먹잖아.""싫어. 나도."숟가락을 더 내밀었다."너까지 왜 이래! 고기반찬만 찾으면 엄마는 어쩌라고. 일요일 하루 쉬는데 아침부터 이럴래!"엄마 목소리가 커졌다."장조림 안 주면 밥 안 먹어!""먹지 마! 너 벌써 한 그릇 넘게 먹었어."눈물이 핑 돌았다. 편식쟁이는 오빤데 내가 혼났다. 엄마는 오빠를 더 좋아한다. 나를 '돼지'라고 놀리는 오빠만 예뻐한다. 나도 이제 편식할 거다. 아무거나 잘 먹는 딸 안 할 거다.- 유은실 <나도 편식할 거야> 중에서자신감 느껴지는 습작이 속상한 이유유은실은 동화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좌절감'과 '경외심'을 꼽는다. 다른 부족의 언어를 익히는 어려움은 자연스럽게 좌절감과 경외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좌절감과 경외심이 느껴지지 않은 습작들을 만나면 속이 상한다고 꾹 눌러 말한다.
"어른인 내가 감히 어린이의 말로 문학을 하려고 한다는 것에서 오는 좌절감이 있어요. 최대한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고 어린이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쓸 때 굉장히 많은 한계에 부딪히거든요. 몇 번 출판사 공모전 심사를 본 적이 있는데, 좌절감이 느껴지지 않는 습작을 만날 때 속상하더라고요. '나 예전에 어린이였어. 난 얘들 알아.' 이런 자신감이 느껴지는 거죠. 후배들이 어린이책 작가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에 대해 나에게 묻는다면 좌절감과 경외심을 들고 싶어요. 어느 순간 내가 좌절을 안 한다면 바로 그때가 망하는 순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제 열 권도 넘게 썼으니까 이번 책은 좀 쉽게 쓰지 않을까 하면, 역시나 어려워요. 그럴 때 좌절을 하면서도 그 좌절에 너무나 안도감이 느껴져요. '나 망하는 길로 가고 있진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그런데 좌절은 동화를 쓰는 어른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지난 5월 3일 김포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 아파트 13층에서 투신자살을 했다. 5월 14일에는 전남 장흥에서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이 영어시험을 앞두고 고민하다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도대체 무슨 좌절감을 느꼈기에 한창 놀기에도 바쁠 초등학생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꽃 같은 몸을 던지나? 동화작가 유은실 역시 최근 아이들이 변화를 실감한다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준다.
"제 연봉이 얼마냐는 질문을 아이들에게 받은 적이 있어요. 얼마 후에 강연을 갔더니 돈을 얼마나 버세요, 돈 잘 버니 좋아요? 이런 질문이 메모지에 적혀 저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아이들이 '연봉'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도 놀랍고, 연봉 얼마 이하면 작가를 안 하겠다는 당당한 의사표현도 놀라웠어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우리 어른들이 만든 세상이 연봉, 연봉 하는 걸요. 강의를 하다보면 예전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학생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아예 선생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선생님까지 나와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선생님이 나와 통화를 하다가 전화기를 붙잡고 우는 거예요. 예전에는 보통 가난하고 가정형편이 힘든 아이들이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으로 친구들을 괴롭혔는데, 요즘에는 인물도 잘나고 부모도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공부 좀 하는 놈들이 약한 아이들을 인격살인 한다는군요. 절대 학교폭력에 걸리지 않게, 교묘하게 말이에요. 더 놀라운 것은 그런 행동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거예요. 그런 아이의 행동을 학부모에게 지적하면, 무슨 증거로 공부 잘 하고 똑똑한 내 아이의 명예를 훼손하느냐고 한다는 거예요. 막막해요. 어린이책 작가인 나는 지금 여기서 도대체 뭘 할 수 있는 건지.""동화는 어린이 편드는 책이에요"얼마 전에 읽었던 <학교의 눈물>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SBS스페셜에서 방송했던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인데, 정말 충격적인 내용으로 가득했다.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신하기도 하고, 전교 등수 10등 안에 드는 학생들이 버젓이 학교폭력을 행사하고도 그다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학교는 망가져 있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비정규직과 정규직으로 노동자를 갈라치고, 강남과 변두리로 삶터를 갈라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정의를 갈라치는 어른의 세상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이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교실에서 재현하는 것뿐이다.
"기성세대로서 아이들한테 너무 미안합니다. 열심히 살면 이뤄진다? 아이들한테 사기 치는 것 같아요. 주인공이 어떤 역경을 딛고 무언가를 이루는 얘기는 안 하고 싶어요. 나는 그런 식의 서사를 더 이상 유포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일상의 순간순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습니다. 어떤 편집자가 '유은실은 실패하는 얘기를 계속하고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저의 최근 작품은 더 그렇지요. 내 작품에서는 잘 실패하는 것이 성공이에요. 우리는 자꾸 성공만 가르치는데 저는 잘 실패하는 얘기를 쓰고 싶어요. 실패는 삶의 일부죠. 우리 인생에서 잘 실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저를 돌아봐도 그래요. 성공보다는 실패를 훨씬 많이 했어요. 한번은 어떤 학부모님이 저에게 '선생님은 왜 동화를 쓰세요?'라고 질문을 했는데, 나는 세상에서 던져진 저 아이들이 가여워서 동화를 쓴다고 답했어요. 그랬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굳으면서 당신이 그런 생각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면 당신 책을 안 읽혔을 것이라고 얘기하더군요. 제 책이 불온서적인 거죠(웃음). 저에게 동화는 어린이 편드는 책이에요. 중립적이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