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사지 출토 瓦(기와) 특별기획전' 개막식
최병렬
안양사의 역사 기록을 보면 <동국여지승람>의 '금천불우조(衿川佛宇條)'에는 "안양사(安養寺)가 있어 그 절 남쪽에 고려태조가 세운 7층 전탑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전탑지는 유유 공장 내 생산동과 사무동사이 공간에서 고려백자 연봉(연꽃봉우리 장식물)과 함께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문헌 속 안양사의 실존을 거듭 확인시켜주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최영(崔瑩)장군(1316~1388)이 7층 전탑(塼塔, 벽돌로 만든 탑)을 보수하고 왕이 환관(내시)인 박원계(朴元桂)를 시켜 향(香)을 보냈으며, 당시 승려 1000명이 성대하게 불사(佛事)를 올렸고 시주를 바친 각계의 인사가 무려 삼천 명이라 기록돼 안양사의 사세(寺勢)가 만만치 않은 대규모 사찰로서 고려 중앙정부와 긴밀히 연동되는 국가 중요사찰로 여겨진다.
또한 이숭인(李崇仁)은 금주안양사탑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를 남겼고,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은 안양사에서 승통(僧統)'능정'스님 진영에 참배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고려 명종때 문신 김극기(金克己)는 "걸어서 아름다운 다리를 지나 감색으로 붉게 단풍진 사찰(감궁紺宮, 안양사)에 이르니, 좋은 구경에 모두 불자라 다행이었네, 푸른 못(벽담,碧潭)은 환하여 가을 달(추월秋月) 잠긴 듯하고"로 시작되는 주옥같은 한시를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이 충남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 중 금천안양사에 거동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과천현감 윤돈이 교대되어 서울로 올라갈 때 금천현감 김문 등이 안양사에서 전별하였을 때 김문이 소주(燒酒)에 취해 상(傷)하여 죽은 일화를 소개하는 등 중요사찰로 여겨진다.
기대했던 유물 별로 없어... 절터 위에 공장 지으며 이미 훼손하지만 당초 기대했던 만큼의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는 통일신라 중초사, 고려 안양사가 존재했다가 일제강점기 포도밭이던 이곳을 (주)유유가 6·25전쟁 이후 매입하여 1959년 5월 안양공장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절터 대부분이 훼손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회에는 유유 공장 부지 발굴과정을 비롯 출토한 고려시대 기와들을 통해 조형적 아름다움과 그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또 20cm 크기의 귀면와, 연꽃무늬수막새와 백자연봉 등 안양사를 상징하는 유물과 각종 도자기 조각 등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유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안양사의 실존을 입증하는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片, 안양사라고 새겨진 기와장)'이다. 이는 지난 2009년 2차 발굴과정에서 승방지(僧房址)로 추정되는 터와 동쪽 회랑부근의 부속 건물지 등에서 4점이 출토됐다.
32cm×25cm 크기 와편에는 7cm 정도의 글씨가 3~4cm 간격으로 3줄로 안양사 명문이 뚜렷하게 적혀 있어 통일신라 중초사 절터 위에 고려시대 안양사가 세워졌음을 증명한다. 또 태정4년 명문 기와도 발견돼 안양사가 1367년까지 사세를 유지해 왔음을 보여준다.
발굴작업을 주도한 한울문화재연구원 장경호 이사장은 "안양사 명문 기와가 안양 지명의 뿌리라 한다면, 고려 귀면와는 그 모습이 아주 복스럽게 친근감을 주는 것이 특징으로, 안양시가 향후 시의 상징물로 이용하면 매우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