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6월 24일) 저녁, 군산 시민단체 회원들이 수송동 롯데마트 사거리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관련자들의 구속 수사를 촉구하며 피케팅을 벌이는 모습.
정은균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2008~현재)'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1961~1998)'와 '정보는 국력이다(1998~2008)' 등을 이은, 최근의 국정원 원훈(院訓)이다.
모두가 거창하기 이를 데 없을 뿐더러, 특히 최근의 원훈에 있는 '진리'나 '무명의 헌신'과 같은 말들은 지난 시절 국정원의 '흑역사'나 국정원 직원의 그 당당한 위세를 생각할 때 너무나도 생뚱맞고 낯간지럽다. 그래도 나는 혹시나해서 국정원 누리집을 찾아보았다. 다음은 예의 '진리'에 붙어 있는 부연 설명이다.
"정치적 중립을 확고히 지켜나가면서 오직 정의와 진리의 편에서 판단함으로써 어떤 이해관계에도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이고 진실된 정보만을 제공하겠습니다"(국정원 누리집의 '원훈' 소개 꼭지에서).나는 그들이 말하는 '정치적 중립'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이해관계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나, "객관적이고 진실된 정보만을 제공하겠"다는 그들의 말은 단 한 마디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사실 그들이 하는 말은, 그들이 내뱉는 그 순간 바로 '진실'이 된다. 다른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저 국정원이 "이것이 바로 진실!"이라는 한 마디를 내뱉기만 하면 된다.
불리할 때마다 강조하는 '국가안보'는 국정원의 전매특허그들은 24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다. 그들은 회의록을 공개하기 전에, 공개 결정을 밝히는 공지 글을 누리집에 올려놓았다. 이 글에서 그들은 "6년 전 남북정상회담 내용이 현시점에서 국가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판단이 있었다고 밝혔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들이 회담 내용을 밝히지 않으면 "국가안보에 심각한 악영향이 초래"될 수 있다는 취지의 내용도 함께 실어 놓았다.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오로지 그들에게 달려 있다. 아무런 근거도 필요 없다. 그냥 "이렇게 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이 없음"이나 "저렇게 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함" 식으로 언표하기만 하면 된다.
국정원은 '직원윤리헌장'에서 자신의 힘의 원천이 국민의 사랑과 신뢰에 있음을 명심한다고 밝혀 놓았다. 그들은 지금 국민이 과연 그들을 사랑하고 신뢰한다고 믿고 있을까. 그들은 또한 자신의 직무 두 번째로 국가 기밀에 속하는 문서, 자재, 시설, 지역에 대한 보안 업무를 명기해 놓았다. 하지만 국내 정치를 이유로 국가기밀의 보안 유지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여 그 내용을 공개해버리는 그들의 행태는 그 어떤 이유로도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이 불리할 때마다 강조하는 '국가안보'라는 말은, 그래서 국정원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한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이다.
'스테레오타입(stetreotype)'은 '견고함'을 뜻하는 'stereos'와 '찍는 것'을 가리키는 'typos'가 합성된 말이다. 이 어원 풀이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스테레오타입은 원래 원판을 복제한 인쇄판을 가리키는 인쇄용어로 쓰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짜'가 아니고 '가짜'이다. 문학이나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 곁을 지나는 거리의 '행인'이나 포장마차의 '취객'과 같은 단역 인물에 해당한다. 그러니 연극으로 치면 무대 세팅의 한 요소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만큼 중요도나 비중이 떨어진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