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정보위원장인 서상기 의원 등 새누리당 소속 정보위원들이 20일 국회 정론관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서 위원장 등 의원들은 기자회견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남북정상회담 발췌본을 공개하고 열람한 국가정보원과 새누리당은 이것이 합당한 절차에 의해 이뤄진 공개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에 공개한 대화 발췌록은 대통령지정기록물이 아니라 국가정보원이 가지고 있는 공공기록물이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열람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발췌록을 본 여당 의원들은 "노 전 대통령 NLL 포기 발언은 확실하다"며 지정기록물 열람을 요구했고, 보수언론은 여기에 합세해 자극적인 문장들로 공격의 강도를 더했다. 그러는 사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않고 새누리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 조작활동을 했던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실은 물타기 되고 있다. 이렇게 대통령기록은 정치적 수세에 몰린 자들에게 또한번의 탈출 도구로 이용 되고 있다.
새누리당과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가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검찰 결정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 2월 '제18대 대선, NLL 관련 고소·고발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국가정보원에서 관리한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기록물이 아닌 공공기록물이라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대해 기록학계와 관련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도 안돼는 결정"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대통령기록은 기록의 소재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쟁점이다. 남북회담록은 당시 대통령 발언이 들어있는 기록이고, 내용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더군다나 그 기록은 국가정보원이 단독으로 생산한 것도 아니다. 당연히 대통령기록물로 관리돼야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검찰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판단을 내렸다. 언제부터 검찰이 그렇게 국민의 알권리를 신경쓰는 곳이 됐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문제는 검찰의 공개의지가 유독 노무현 전 대통령 기록에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검찰은 알권리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검찰은 얼마 전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관련 핵심정보를 담고 있는 수사기록을 비공개로 결정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인 전재용씨 등 관련자들의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가 있고 명예를 훼손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검찰은 지금 다양한 이유로 천문학적 금액을 국가에 내지 않고 있는 자의 명예는 지켜주면서 향후 한국의 역사를 증명할 대통령기록의 명예는 땅으로 떨어트리고 있다. 검찰마저 대통령기록을 동네북 취급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민주당마저도 대화록 공개 정치공방에 휩싸여 대통령지정기록을 정쟁의 도구로 삼고 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얼마 전 최고위원회에서 국정원에 대한 국정조사를 먼저 한다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과 사본 모두를 공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충격적인 일이다. 민주당의 이런 발언으로 대통령지정기록은 정치협상의 도구로까지 전락했다. 문재인 의원 역시 긴급 성명을 통해 "누차 강조했듯이 결코 해서는 안될 어리석은 짓이지만 이제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됐다"면서 "대화록과 녹음테이프 등 녹취자료 뿐 아니라 회담 전 준비자료와 회담 이후 각종 보고자료까지 함께 공개한다면 진실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의원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지만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다른데도 아닌 대통령지정기록제도의 취지를 그나마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던 민주당의 이러한 태도는 새누리당이나 검찰이 보였던 어떠한 행태보다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노무현 대통령 기록이 가장 많은 이유 그렇다면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왜 만들고 왜 지정기록물로 분류해 특별히 관리하도록 했을까. 이렇게라도 관리하지 않으면 정쟁에 휩싸여 후대에 기록을 남기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임하는 대통령이 기록을 남겨도 걱정이 없게끔 하려고 대통령지정기록이라는 것을 만들어 15년 동안은 기록을 건드리지 말고 지켜주자고 한 것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제정 직후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록이 이승만부터 김대중까지 이전 모든 대통령이 남긴 기록의 양보다 많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런데 그 제도를 민주당까지 합세해 훼손하고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다른 것도 아닌 외교정상회담록공개라니. 이러한 기록을 공개한 사례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대통령기록에 대한 권위 뿐만 아니라 외교관계에 대한 신뢰 역시 한 번에 잃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대통령기록을 동네북처럼 취급하게 됐다. 그래서 자기한테 불리할 때마다 기록을 소환해 분위기를 바꾸려 든다. 때문에 7년 전의 일도 어제 일인 것처럼 아니 어제의 일보다도 더 시끄럽게 환기되고, 이미 죽은 자는 아직도 호명되고 있다.
이후의 대통령은 덕분에 톡톡히 학습을 하게 됐다. 어떻게 하면 꼬투리가 잡히는지, 어떻게 하면 동네북이 되는지 말이다. 대통령으로서 했던 자신의 행동을 지켜줄 수 있는 방패가 얼마나 약한지, 정치꾼들의 공격의 이빨은 또 얼마나 강한지. 대통령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어느 대통령이 기록을 제대로 남기려 하겠는가.
이미 대통령기록은 훼손될대로 훼손되었다. 그렇게들 공개하자고 물어뜯고 있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은 이제 7년 후면 봉인이 해제된다. 지금 그 봉인을 풀고 나면 정작 7년 후, 70년, 700년 후에 후대에 남겨줄 기록이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 눈 앞의 위기를 피하겠다고 근본을 훼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또한 역사를 망가뜨리는 위험한 짓이기도 하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