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전병헌 원내대표가 21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국정원 국기문란 사건 국정조사 실시 촉구대회에서 규탄발언을 하고 있다.
남소연
아마도 야권, 특히 민주당의 고민은 이번 국정원 사건이 오히려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사건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이는 민주당이 평소에 수권정당으로서의 능력과 자격, 그리고 국민적 신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 몸을 던져서라도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각오와 결의가 미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세간에 "100명이 넘는 민주당 의원들보다 표창원 경찰대 전 교수 한 명이 훨씬 더 낫다"는 얘기가 돌아다닐까. 자신의 깜냥에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부딪혔을 때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그 현실을 일단 회피하는 것이다. 지금 민주당이나 전체 야권의 모습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난 대선의 결정적 하자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앞장서서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책임자 및 관련자를 엄중하게 처벌한다면 설령 지난 대선에 결정적 하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박근혜의 사퇴를 요구하는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24일 서한 답변형식으로 "국정원 댓글사건 왜 생겼는지 전혀 모른다"라고 밝혔다. 앞에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고 뒤로는 법무장관이 직접적으로 검찰수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의 양상이 계속 되풀이된다면 전 국민적인 저항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검찰이 밝혀 낸 (몇몇 언론사들이 파헤친 수준에도 한참 못 미치지만) 공소사실만으로도 정권의 정당성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임을 청와대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지금은 무엇보다 사건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들만으로도 지난 대선은 공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 왜 이 현실을 두려워하는가?
국정원이 공개한 노무현 NLL 포기 발언의 진실은? 이번 국정원 사건의 본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최근에 다시 불거진 노무현의 NLL 관련 발언이다. 궁지에 몰린 국정원이 정상회담 녹취록을 갑자기 국회 정보위 소속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공개했고 이를 통해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국면전환을 노린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NLL 문제가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과 전혀 무관하게 터져 나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난 17일 국회 법사위에서 민주당의 박영선 의원은 지난 대선 때 국정원에서 NLL 카드를 정략적으로 이용해 선거에 악용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폭로했다. 이는 새누리당 의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NLL 발언만 공개했어도 지난 선거에서 쉽게 이겼을 것이라며 원세훈이 "우리 편이 아니다"고 주장한 데 대한 반박으로 나온 것이었다.
우선 새누리당에서 녹취록을 공개한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대한민국의 외교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힌다는 점 등은 따로 다뤄야 할 문제이다. 여기서는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과 관련해서 중요한 점만 짚어 보려고 한다.
24일 국정원이 일방적으로 공개한
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 을 보면 이런 표현들이 나온다.
"그것이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인데...그러나 현실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위원장님하고 인식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NLL은 바꿔야 합니다. 헌법문제라고 자꾸 나오고 있는데 헌법문제 절대 아닙니다."먼저, NLL의 국제법적·논리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주장은 역사적인 팩트를 지적한 것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는 지난 1996년 김영삼 정부 때 NLL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보거나 (
관련기사 : 여야 바뀌니 11년전과 상반된 주장…NLL 논쟁 "역시 소모적"), 당시의 <조선일보> 기사(
"[해상북방한계선 파문] '합의된 선' 없어 논란 무의미" , 1996년7월17일자)를 보더라도 명확하다.
그리고 NLL이 헌법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현행 대한민국 헌법이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적시하고 있기 때문에 NLL이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이런 내용은 "NLL은 안 건드리고 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NLL은 바꿔야 합니다"라는 말은 발췌록에도 나오듯이 "안보 군사 지도 위에다가 평화 경제 지도를 크게 위에다 덮어서 그려보자는 것"의 의미이지 이것을 "NLL 포기"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남북의 군사력이 서해에서 무력으로 충돌하는 상황을 '바꿔' 남북 모두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는 조치를 고민해 보자는 의미에서 "NLL을 바꿔야 한다"는 제안이 왜 'NLL 포기'로 해석돼야만 하는 것일까?
오히려 노무현은 NLL이 "현실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발췌록이 공개되자 새누리당에서도 "NLL 포기" 대신 "NLL 무력화 무효화"라는 새로운 표현을 들고 나왔다.
"국제법적으로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 "서해 평화지대를 만들자"는 말과 "NLL을 포기한다"는 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만약에 노무현이 정말로 NLL을 포기했다면, 예컨대 지난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 때 북한이 왜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을까?
2012년에 있었던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 논평에서도 "북방한계선 자체의 불법 무법성을 전제로 한 북남합의"라는 말은 나오지만 남한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거나 양보했다는 주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NLL 논란은 북방한계선이 임의로 그어졌다는 사실과 서해 평화지대 구축 제안을 영토선 포기로 확대해석하면서 양산된 것이다. 누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확대해석을 내놓았을까? 박영선 의원에 따르면 이 또한 국정원의 공작이라는 제보가 있었다. 아직은 제보 수준이니까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건을 수사하면서 명백히 밝혀져야 할 내용이지만, 우리 모두는 지난 대선 기간 내내 NLL 문제가 중요한 선거이슈였음을 기억하고 있다.
특히 '50대의 반란'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종북 빨갱이에게 나라를 넘길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특전사까지 나온 문재인 후보가 종북 빨갱이로 몰린 데에는 NLL 논란이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정원에서 만약 문재인 후보를 낙선시키기로 결심하고 여론조작에 임했다면 국민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할 수 있는 NLL 이슈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국정원은 당시 관련 녹취록 공개 여부를 두고 검찰 등과 '밀당(밀고 당기기)'을 즐겼다.
이것이 정말로 국가안보와 영토수호에 중요한 문제라면 재빨리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매듭지었어야 할 일이었다.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계속해서 끌고 다닌 것은 오히려 북한에게 이로운 행위이다. 결국에는 자신들의 정략적인 이득이 목적이었다는 의구심이 생기는 것도, 그래서 국정원 내부 제보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건 민주주의 문제다 검찰과 언론이 밝힌 바에 따르면 국정원은 국내 정치 사안에 지속적으로 개입을 했고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공작을 수시로 벌여왔다. 이 작업은 지난 대선을 전후해서 정점을 찍었다. 여론조작의 내용에는 4대강 사업에서부터 무상급식에 이르기까지 지난 MB 정부 시절의 온갖 첨예한 이슈들이 망라돼 있다. NLL 문제는 예외였다고 과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대통령 스스로가 지난 대선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철저한 진상조사와 관련자 처벌에 나서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건에 대해 24일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왜 그런 일을 (국정원이)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면서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건에 연루가 되었는지 여부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