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하굴 안내석견훤왕
김수종
견훤은 서기900~935년까지 후백제의 왕으로 재위했으며, 관제를 정비하고 중국과의 국교를 맺고, 궁예의 후고구려와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후에 고려 왕건에게 투항했다. 왕건에게 자신의 아들인 신검왕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는 본래 이(李)씨이며, 상주의 호족 아자개(阿慈介)의 장남이다. 상주군 가은현에서 태어났다. 신라 백성으로 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는데,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892년 반기를 들고 일어나 여러 성을 공략하고, 무진주를 점령한 이후부터 독자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900년 완산주에 입성하여 국호를 후백제라 하고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927년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함락하여 경애왕을 살해한 후, 효종의 아들인 김부를 경순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경순왕은 친 고려 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신라의 민심은 고려의 왕건에게 기울어져갔다. 929년 고창에서 왕건의 군사에게 크게 패한 후부터 차츰 형세가 기울어 유능한 신하들이 계속 왕건에게 투항하고, 934년 웅진 이북의 30여 군현, 동해연안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속했다.
이듬해 왕위 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왕이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했으나 탈출했다. 그리고 스스로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상부 칭호와 양주를 식읍으로 받았다. 936년 왕건에게 아들인 신검왕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나는 금하굴을 둘러 본 다음, 마을 안쪽에 있는 견훤의 옛 집터를 살펴보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는 분명 금하굴, 금하정, 숭위전, 견휜의 집터를 알리는 문구와 표시가 있었지만, 도저히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변변한 표지판도 안내문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마을 주민들에게 길을 묻고 물어 겨우 찾아간 옛 집터에는 소를 키우는 우사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안내문도 없는 곳에 조금 큰 바위가 하나 있어 '이곳이 옛 집터에 있던 바위구나'라고 상상을 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