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위해 살다가신 이기형 선생님, 영면하소서

일평생 한반도 평화통일을 노래한 민족시인 이기형 선생님 영전에

등록 2013.06.18 12:38수정 2013.08.02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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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민(與民) 이기형(李基炯) 선생님께서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조국의 평화통일에 관련한 행사에 꼭 참석하셔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항상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향년 96세로 천수를 다하셨지만 오직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조국의 통일을 보고 떠나시겠다며 건강을 지키시던 민족시인 이시며 민중의 스승이셨다.

언제나 초노처럼 정정하시고 약속을 철저히 지킨 성의는, 칠순을 갓 넘긴 나에게도 따라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선생님의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새삼스럽게 여쭤보면 단 1초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고 알려주셨다. 그런데 몇 달 전에 그만 걷기가 힘들어지시기도 했다.

지난 5월 중순에 병원에 입원해야 할 처지에도 모임에 참가하셔야 한다며 집을 나선 선생님이셨지만 힘이 들어보였다. 그리고는 결국 입원을 하셨다. 소식을 늦게 듣고 6월 초에야 찾았던 병실에서 "구암이 찾아왔다"고 하시면 고개를 끄덕이시던 선생님. 선생님이 곧 회복되리라 믿었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난 12일, 결국 선생님은 조국 분단을 뒤로한 채 눈을 감으시고 말았다.

여민 선생님께서는 비운의 일제 강점기를 거쳐 식민지하에서 젊음을 보내시며 오직 조국 광복을 그리고 민족해방을 위해 살아오셨다. 선생님께서는 1917년 '변신의 달인'이었던 박정희와 동갑내기로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셨다. 야학을 통해 항일 독립투쟁운동에 접하게 되고 1933년 이후 소설가 한설야·사학자 문석준·독립운동가 여운형·시인 임화·소설가 이기영 등을 만나며 조선 독립과 문학의 역할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1938년 함흥고보를 졸업하시고 도쿄일본대학 예술 창작과에서 수학한 후 1945년까지 학병거부 지하 항일투쟁 관련 혐의로 피검돼 1년여 동안 복역하고 해방소식을 접했다. 여민 선생께서는 신문사 정치부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인 박헌영·김삼룡·이주하 등을 만나고, 1947년 7월 19일 선생의 정신적 지도자로 여겼던 몽양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하자 월북해 <민주조선> 사회부 기자를 하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해 취재를 했다. 이후 선생님께서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 체포돼 투옥된 뒤부터는 가족을 위한 구멍가게와 학원 운영 그리고 강사와 번역일 등 하시면서 서울에 침거하셨다.

1980년 시인 김규동·소설가 남정현 등 지인을 통해 시인 신경림·평론가 백낙청·시인 이기영을 만나 당초 분단조국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꾸고 시 창작과 함께 민족평화통일 등 사화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시며 민족작가회원으로 활동하셨다. 1982년 첫 시집 <망향>을 내고 1989년 시집<지리산> 필화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불구속 기소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99년 4월에는 4월혁명상을 수상, 2001년 시집 <산하 단심>과 2003년 <봄은 왜 오지 않는가?>를 펴내셨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북한 고향 하늘 아래 2003년과 2005년에 평양을 방문, 2009년 열 번째 시집 <절정의 노래>를 발간하셨다. 선생님은 1980년부터 2013년 1월까지 재야 민주화운동과 평화통일 단체의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석하셔서 추상같은 즉흥시를 읊으시며 모임을 축하하시고 격려하셨다.


그리고 한국작가회의 고문을 지내시면서 중앙과 지방에도 꼭 참석하셔서 분단 조국의 아픔과 평화통일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언제나 참여하셨다. 한국 전쟁 희생자 유족회에서 시를 낭송하시고 격려 말씀을 힘차게 하시기도 했다. 선생님은 앞에 소개한 시집 말고도 <설제> <지리산> <꽃섬> <삼천리통일공화국> <별꿈> <해연이 날아온다>를 펴냈다.

여민 선생님이 운명하시기 전날, 나는 선생님의 병실을 찾아갔었다. 가끔 숨을 가쁘게 쉬시고 음식 섭취가 여의치 않아 호스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계셨다. 그때 눈을 감으시고는 좀처럼 뜨지 않으셨다. 89세의 사모님이 곁에서 구암 선생이 왔다고 하셨지만, 고개만 끄떡하셨다. 너무나도 슬픔이 차올라 사모님은 흐느껴 우시고 나도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어떻게 만나신 사모님이신가? 북에 따님을 두고 오셨지만 남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이신 방현주 사모님을 만나 아드님 이휘건을 두고 자부로 윤석희를 둬 중학생과 초등생 손녀 둘을 두시고 귀여워하셨다.


재야와 한국작가회의 주관으로 '민족시인 여민 이기형 선생 통일애국장'을 발인이 있기 전날 7시,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각계인사 다수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됐다. 민중의례에 이어 약력보고 맹문재 시인의 조시, 오종렬 진보연대의장과 권오헌 양심수후원회장 그리고 이부영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장의 추도사가 있었다. 노래극단 희망새는 조가를 불렀다. 유가족 대표로 외아들인 이휘건 한양대 이공대 교수와 자부인 윤석희 변호사가 자리했다. 사모님은 내내 눈물을 흘리셨다. 이어서 아드님인 이 박사가 자세한 선생님과의 지난 삶을 담당하게 말해 주었다.

"사실 어려서 너무나도 가난했던 시절 진학을 할 때마다 아버님은 괴로워 하셨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계속 공부를 희망했고 대학을 진학한다고 하니 잘했다는 말씀을 주셨지만 얼마나 학비가 어려운데 승낙을 하실까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대학을 가고 그리고 유학까지 고집해서 갔습니다. 아버님의 가정형편으로 치면 불가한 일이었지만 반대를 하시지 안하셨기에 결국 학업을 계속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담담하게 아버지의 신분이 어려움과 가정사의 어려움을 어렵게 토해내는 아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참으로 장한 아들이고 며느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민 선생님은 이런 아들과 며느리를 두시고도 자랑을 하지 않으셨다. 퍽이나 안정된 효자효부를 두신 여민 선생님이셨지만, 정신에는 하루빨리 통일이 돼 북의 고향을 찾아 부모님 묘소에 성묘하고, 이산가족들이 모두 자유롭게 만나는 그날을 기다린다고 하셨다. 나와의 만남은 20여 년 전부터 시작됐다. 한국작가회의에서 선생님을 뵙게 됐다. 특히 여운형 선생 건준에 희생된 나의 맏형을 아시면서 친아들처럼 대해 주셨고 나의 출판기념회에서 격려사를 해주셨다. 문집에도 축하 격려의 시를 꼭 써주셨다. 나는 이를 잘 간직하고 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보다 더 활발한 평화통일운동을 하자'고 언제나 격려해주셨다.

여민 선생님은 통상 몽양 여운형 선생의 비서로 이해돼 왔지만, '비서가 아닌 진실로 조국의 애국자이기에 존경을 해 왔다며 여운형 전기를 썼다'고 고백했다. 1991년 <몽양 여운형 전집> 발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아래의 축사를 남겼다.

"몽양을 거론다다는 것은 언제나 감격이요 약동이 아닐 수 없다. 몽양을 말한 많은 사람들을 한 결 같이 몽양을 영원한 청춘이라 했다. 몽양은 결코 죽지 않았다. 몽양은 이 땅의 역사와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몽양의 현재성은 재확인 할 때마다 통일 위업을 생각하게 되고 변화하는 세계사에서 민족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 세 가지 주의에서 무슨 새로운 주의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몽양을 앉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한다."(<몽양을 생각하며>)

그리고 시 <해연(海燕)이 날아온다>를 소개한다.

고구려 넋은 어디로 갔나
백두산 신단수 큰 할아버님이 내려다 보신다
선열들의 피맺힌 목소리가 들린다
슬픈 사연 하도 많아 누선도 말랐느니
피 마르는 지겨움 가슴이 빠개 진다
임 따라 어라연엘 가랴
임 맞으러 삼지연엘 가랴
지는 해야 빨리 져다오
솟는 해야 뻐뜩 솟아주렴
폭풍우 천 길 만파를 뚫고
바다제비 날아온다

여민 선생님은 지난 14일 사랑하는 가족과 언제나 따르는 후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모병원에서 발인하고 통일동산 방향에 있는 이북 5도청 향민들이 잠들고 있는 묘역 제 62호에 안장되셨다. 선생님은 분단조국에 곧 통일이 다가올 것 같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건강을 챙기셨다. 베드로 영세명으로 세례를 받으시면서 언제나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 오기를 염원하시면서 하세하셨다.

여민 선생님! 민족 그 자체이신 선생님! 이제 시름 다 내려놓으시고 부디 천상에 드시어 영면하소서! 저희들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12일 민족시인 여민 이기형 선생님이 서거하셨다. 올해로 96세가 되신 여민선생님은 북을 고향으로 월남하여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온 생애를 다 바치시고 운명하셨다. 언제나 "단 1초도 쉬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키시면서 오직 분단조국의 통일을 염원했다. 그러나 어느때는 좌절도 하셨지만 항상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셨다.

우리는 여민 선생님의 조국과 동포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나 자책하기만 했다. 저리도 많은 연세에도 열정적인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히시는 굳은 열정에 경의를 표하면서 따라서 열심히 운동을 하곤 했다. 선생님의 건강은 타고 나신게 아니라 스스로 엄격하게 지키신 나라사랑 같은 의지였다. 우리에게 남겨주신 분단조국 통일의 불길을 계속 펼치려 한다.
#분단조국 #민족시인 #민족평화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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