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까지 투철한 이념과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뚝심 있게 정치활동을 해 온 정치세력은 없다는 생각이다.
진보신당 누리집 갈무리
하지만 이런 위기의 정국에서 더욱 눈길이 가는 한 정당이 있다. 아주 작고, 현재는 원내 의석 하나 없지만 '존재감' 하나만큼은 확실한 정당이다. 한 때는 노회찬·심상정·조승수 등 스타 정치인들을 보유했고, '원내 정당'으로서의 기억도 가지고 있는 '진보신당'이다. 개인적으로, 참 성실한 당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싶은 정당이다. 가장 선명하고 전투적으로 자본주의의 폐해, 한국 사회의 반 노동 세태 등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현장 활동에도 열심이다.
PD(민중민주) 계열을 주축으로 한 세력이, 당시 당 주류 세력을 비판하며 민주노동당에서 '엑소더스'를 감행해 '진보신당 연대회의'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진보정당을 차릴 때만 해도, 이 정당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창당 직후 맞이했던 총선에서의 선전을 비롯한 참신한 정치활동으로 창당 이후 5년여 동안, 한국 사회에 늘 신선한 충격을 던져 왔다. 특히 '묻지마 반MB'에 반대하며 선명한 진보정치라는 깃발 아래 독자 노선을 지켜 왔던 순수성 행보는 한결같이 우직했다.
그리고 현재의 진보신당에는, 노회찬·심상정·조승수 등 진보정치의 명망가들이 '현실론'을 기반으로 통합진보당 창당에 합류할 때 끝까지 합류를 거부하며 당에 남은 열혈 당원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결국 사회당과의 합당을 거쳐 독자적으로 지난해 총선을 치르다가 '정당 등록 취소'라는 아픔을 겪었지만 곧 재등록을 했다. 지금은 더 튼튼한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한 재창당을 준비 중이다. 진보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시기에, 진보신당의 이러한 '고집불통 행보'는 우려와 동시에 일종의 존경심을 자아낸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까지 투철한 이념과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뚝심 있게 정치활동을 해 온 정치세력은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진보신당, '순혈주의'를 탈피하라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진보신당도 이러한 경직된 정치행보의 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선명한 진보를 향한 진보신당의 여정은 분명 매력적이었고 칭찬받을만했지만, 진보신당은 시민단체나 운동권 서클이 아니라 엄연한 하나의 '정당'이기 때문이다. '정당'이라면 '정치'를 해야 마땅하고, '정치'는 '권력'을 지향해야 한다. 어떠한 화려한 명분이나 수사도, 권력으로 승화돼 이 땅에서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다.
물론, 미니 정당의 외로운 외침이 정치판에서 논의되는 '의제의 진보화'에는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전유물에 가까웠던 '경제 민주화' '반값 등록금' '무상 보육' 등의 의제들이 새누리당에서조차 논의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마저도 설득력을 잃은 듯 보인다. 이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목소리만 높여서는, 국민들로부터 최소한의 눈길조차 받지 못할 것이다.
이상 사회를 위한 그림만 그리기보다 그 약속 중 하나라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던지는 것이 바람직한 정치 세력의 선택이고 행보다. 그동안 진보정치세력이 현실 정치 상황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뚝심 있는 행보를 통해 이뤄왔던 '의제의 진보화'는 이미 어느 정도 이뤄졌고, 이제 그것은 당 밖의 학계나 시민사회·여론에 맡겨도 충분하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선명히 내걸고 그에 맞게 활동을 하더라도, 실제적인 정치적 힘을 가지지 못하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진보신당은 2011년에 진보신당을 떠나 통합진보당 창당에 합류한 노회찬·심상정·조승수의 선택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이 선택은 진보의 위기에 불씨를 당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점에서 그들의 선택은 정치인으로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무엇이든지, 지금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지 못하는 정치는 정치로서의 의미가 없다. 또한, 지금 이 땅의 상황을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지 못하는 정치 세력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체성의 선명성도 좋지만, 대한민국 사회와 같이 반노동적인 사회에서 비정규직과 노조 관련 법안 단 한 개라도 발의하려면, 무엇보다도 정치적 힘을 가져야 한다. 만일 진보신당이 지금처럼 경직된 태도로 '진보 순혈주의'를 고수하며 '헤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식의 행보를 보이면 당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진보의 위기 속에서 '지금의 진보'를 생각하자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준말'이라고 했다. 비록 진보의 겨울이라 할 만한 상황이지만, 진보신당에게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는 선택을 위한 기회는 얼마든지 열려 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진보정의당의 재창당 과정에의 합류라고 생각한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진보신당 내에서 이를 위한 논의는 시작해볼 만하다.
물론 '묻지마 세력연합'은 의미가 없다. 북한에 대한 평가가 현저히 다른 통합진보당 세력과의 재결합은 설득력이 전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는 진보신당이 진보정의당과도 따로 가야 할 이유는 납득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진보정의당은 자유주의 세력인 국민참여당계가 당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정당이다. 하지만 그 또한 진보신당에게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기회라 볼 수 있다. 노회찬 대표를 통해서, 진보정의당도 진보신당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음이 확인되지 않았는가.
앞으로 야권은 '춘추전국시대'로 운영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과, 아직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등장이 확실시되고 있는 안철수 신당이 야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각축전을 벌일 때 그 싸움 속에서 진보정당이 생존하고 작은 정치적 지분이라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진보신당의 선택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정당에게 있어서, 정치적 힘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가치와 정체성의 선명성을 조금 양보하는 것은 절대 '변절'이나 '기회주의'가 아니다. 진보신당이 지금처럼 '상인적 현실감각' 없이 '서생적 문제의식'에만 몰두한다면, 결국 당은 풍차를 향해 달리는 '돈키호테'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진보의 위기라 할 만한 시대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진보, 부드러운 진보로 우리나라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친 복지적, 친 노동적 사회로 이끌기 위한 진보신당의 유연한 대처를 기대해 본다. '언젠가 이뤄질지도 모르는 저기 저 너머의 진보'가 아닌, '지금 이 땅의 진보'를 위한 여정을 위한 결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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