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선생유배지에는 그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 유배생활을 했던 ‘적중거가’라고 적힌 초가 한 채, 적려유허비가 있는 비각, 강당인 애우당이 있다.
김종길
소격서 철폐, 향약 실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개혁정치에 가속을 더한 그는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을 단행하다가 결국 1519년(중종 14) 11월에 훈구파의 모함을 받아 이곳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1개월 만인 12월 20일에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 후 1667년(현종 8)에 이르러 당시 능주 목사였던 민영로가 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새겼다.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적려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갔던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를 말한다. 이 비는 조선 중종 때 이곳에 유배당한 조광조 선생의 옛 자취를 기록해 두고 있다. 비는 받침돌 위로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다. 비신에는 앞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는 글씨를 2줄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선생의 유배 내력을 적었다. 머릿돌은 반달 모양으로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엉키어 있고 뒷면에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