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인 이기형 선생
박도
나는 간다[부고] 시인 이기형 회원 별세,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23호실, 발인 : 6월 14일.
12일, 작가회의에서 문자로 이기형 선생의 부고를 받고, 새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선생님과의 이런저런 추억을 되새기며 서가에서 선생의 시집을 찾았더니 네 권이 나왔다. <지리산> <별꿈> <산하단심> <봄은 왜 오지 않는가> 등이다.
역마다 백두산표를 안 팔아나만 미쳤다고 쑥덕인다과연 누가 미쳤나흑발이 백발이 되도록귀향표를 사려는 놈이 미쳤나기어이 못 팔게 하는 놈이 미쳤나그럼 나는 간다………………- 이기형 지음 '나는 간다' 선생은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셨다. 12세 때 야학을 통해 반일 독립운동에 눈을 뜨게 되셨고, 한설야·임화·이기영 등의 당대 문인을 만나 시혼을 가다듬게 되셨다. 특히 해방 공간 속에 <동신일보> <중외신보> 정치부와 사회부 기자로 지내면서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 그날부터 몽양의 인품에 매료되어 평생 몽양 선생의 전도사로 <몽양 여운형> 전기도 남기셨을 뿐 아니라, 몽양 추모사업에도 앞장서셨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기형 선생'하면 곧장 '몽양 여운형 선생'을 연상케 했다.
이기형 선생과의 만남나는 선생님을 1990년 후반 작가회의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 무렵 공덕동 작가회의 사무실에서 매달 작가들의 '만남의 날' 모임에 선생은 개근을 하셨다. 그때 나는 선생의 외모나 풍기시는 체취가 선친과 매우 흡사하여 모임이 끝난 뒤 그 사연을 말씀드리자 대단히 반가워 하시며 별도 주점에서 소주잔을 나누게 되었다.
어느 하루, 선생은 내가 훈장인 줄 아시고 처녀 교사 가운데 당신 며느리 감을 부탁하기에 내가 월하노인 역을 했으나 서로 인연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은 내 누이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주셨다. 2000년 5월 광주 비엔날레 공원에 김남주 시비 제막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 아내의 차에 모시고 돌아오면서 선생은 당신의 인생역정과 사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선생은 그때 아들 며느리의 따뜻한 봉양을 받으며 사신다는데, 2대가 한 집에서 사는 비결은 부모가 아들 내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뒤 2007년 몽양 여운형 선생 60주기 기념 인터뷰 때 내가 근황을 여쭙자, 여전히 아들 내외의 알뜰한 봉양을 받고 사신다고 하셨다.
선생 내외는 직장에 나가는 아들 내외를 위하여 육아와 집안청소뿐 아니라, 심지어 며느리 속옷까지 세탁해 준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내외가 집에 와서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온갖 잔일까지 스스로 다하니까, 아들 내외가 당신들이 없으면 불편하다고, 오히려 한 집에서 같이 살자고 붙잡는다고 하셨다.
2005년 7월, 선생과 나는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에 동행하였다.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7월 25일 아침 이기형 선생은 고려호텔 로비 의자에 앉은 채 눈물을 지으셨다. 사연인즉, 바로 눈앞에 따님을 두고도 만나지 못하고 떠나는 아비의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아픈 사연이었다. 선생이 고령임에도 굳이 이 대회에 참석한 것은 평양에 두고 온 혈육을 만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선생이 평양 도착 후 관계자에게 누누이 부탁하였으나 그들은 기다려 보라고만 하여 기대하였으나 떠나는 날 아침까지 끝내 부녀 상봉을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따님이 사는 곳이 우리가 전날 들렀던 옥류관 냉면집 부근이었다고 하니 그때 그곳을 지나쳤던 이기형 선생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 뒤로도 선생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해방 공간에 가장 뛰어난 우리나라 민족지도자는 몽양 여운형 선생으로 "몽양의 노선이 옳았다"고, 그 무렵 좌우합작만이 조국 분단을 막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역설하셨다. 선생님은 내가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와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펴낸 것을 아시고, 당신 생전에 몽양 여운형 사진집을 내고 싶다고 그 일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하지만 사진 자료 부족에다 나의 게으름으로 끝내 엮지 못하였다.
나는 이즈음 <개화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이어 <미군정기>를 펴내고자 해방 직후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그 시대 역사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이 가장 앞을 내다본 지도자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고, 그때마다 이기형 선생이 내게 들려주신 "몽양의 노선이 옳았다"는 말씀에 공명하고 있다.
다음은 이기형 선생이 나에게 들려준 몽양 선생 이야기다.
첫 눈에 반하다내가 처음 몽양을 본 것은 함흥고보를 졸업한 1938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지도자를 찾고 있었다. 경성부 계동 140번지 8호를 찾았을 때 몽양은 집에 없었다. 곧 돌아오실 거라는 말에 그 부근을 서성이며 기다렸다. 해거름 때쯤에 감색 레인코트에 밤색 중절모를 쓴 풍채 좋고 훤한 분이 골목을 돌라 올라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진도 본 일이 없건만 직감적으로 대번에 여운형 선생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몽양 선생님이시지요?" 나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예, 그렇소마는…." 선생의 빛나는 눈빛과 반백 콧수염과 다정한 눈웃음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그 댁 문간방에 마주 앉아 몽양 선생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야구공 하나가 마룻바닥에 날아 떨어졌다. 담 저쪽은 휘문고보 운동장이었다.
몽양은 빙긋이 눈웃음을 치며 공을 들고 마당에 내려가더니 낮은 벽돌담위로 "이봐 학생!"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떻게 야단치나?' 하고 퍽 궁금했다. 담 너머 학생을 향해 몽양은 공을 던지셨다.
"공 예 있어. 씩씩하구먼. 맘껏 뛰놀아!"전혀 뜻밖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몽양의 용모를 살펴보면, 빛나는 두 눈, 넓고 번듯한 두드러진 이마, 우뚝한 코, 복스러운 큰 두 귀, 처지지도 빠지지도 않은 아래턱 윤곽 등 어느 하나 빠지는 데 없고 빈틈없는 용모이시다. 언론인 김을한의 표현을 빌리면 몽양은 그야말로 '미스터 코리아'로 손색이 없는 분이셨다.
몽양 여운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