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영 측우기(진품). 이는 현재 남아있는 하나 뿐인 측우기로 과거 공주감영(公州監營, 금영)에서 사용됐다. 측우기에 대한 설명이 측우기 겉면에 적혀 있다. <금영측우기 고일척오촌 경칠촌 도광정유제 중십일근> 이는 높이 1척 5촌, 지름 7촌, 무게 11근(=6.2kg)을 의미한다.
정연화기자
요즘처럼 하루 동안 내린 비의 양을 알 수 있는 것은 이를 측정하는 기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우량(降雨量)은 언제부터 측정해 왔을까.
조선 세종 이후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쓰인 기구가 바로 '측우기'다.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장영실'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사실은 장영실이 아닌 세종의 세자인 '문종'이 발명자다.
조선시대 정사를 기록한 자료에 따르면 문종이 왕세자 시절이었던 1441년(세종 23년) 측우기를 발명했다. 이듬해인 1442년(세종 24년)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깊이 1.5척(약 30cm), 지름 7촌(약 14cm)의 측우기를 만들었다. 서울과 각 도 군현 등 전국 각지에 이를 설치해 강우량 관측을 실시했다.
측우기에 모인 빗물의 양은 주척(周尺)이라는 자를 사용해 측정했다. 때문에 각 지역의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측우기를 이용한 각 지역의 강우량 관측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한동안 중단됐다가 1770년(영조 46년)에 재건돼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세종 때의 측우기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1639년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처음으로 측우기로 강우량을 알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1658년부터, 영국에서는 1677년부터 관측했다. 한국에서는 1442년 5월부터 측우기로 우량을 측정했으니 이는 서양보다도 약 200년이나 빠른 것이다.
현존하는 진품 측우기는 '금영 측우기'가 유일측우기가 발명되기 전 강우량은 호미나 쟁기로 땅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재어 측정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41년 당시 조선에는 극심한 폭우, 혹한, 가뭄이 반복됐다. 그 당시 알맞은 시기에 적당한 비가 내리는지가 풍작과 흉작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하지만 비가 온 후 젖은 흙의 깊이를 재는 것은 토양의 종류, 성질, 건조도에 따라 달라져 각 지역의 강우량을 비교하기엔 불가능했다. 세종의 세자인 문종이 측우기를 발명하면서 과학적인 우량 관측을 통한 농업기상학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
현재 측우기 진품은 '금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1837년(헌종 3년, 보물 제561호)에 제작된 이 측우기는 공주 감영(금영, 지금의 충남 공주)에서 사용됐던 것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와다 유우지에 의해 일본 기상청으로 반출됐다. 이후 1971년 한국문화재 반환운동의 일환으로 중앙관상대(=현재 기상청)가 돌려받아 현재 기상청이 소장하고 있다. 측우기에 대한 설명이 측우기 겉면에 적혀 있다. <금영측우기 고일척오촌 경칠촌 도광정유제 중십일근> 이는 높이 1척 5촌, 지름 7촌, 무게 11근(=6.2kg)을 의미한다.
측우기만 달랑(?)... '측우대'까지가 한 묶음측우기만 세워 놓고 통에 들어간 빗물을 측정하면 되는 걸까. 아니다. 측우기를 올려놓기 위한 받침대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측우대(測雨臺)'. '화분-화분받침대'처럼 '측우기-측우대'도 한 세트다. 측우대는 주로 화강석 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윗면은 지름 약 16cm, 깊이 4cm 또는 2.5cm의 원형으로 오목하게 파서 측우기를 세울 수 있도록 했다. 조선시대 측우대는 1910년대 10대가 확인됐다. 하지만 현재는 ▶관상감 측우대 ▶대구 선화당 측우대 ▶창덕궁 측우대 ▶통영 측우대 ▶연경당 측우대 등 총 5개가 남아 있다.
① 관상감 측우대 [1441년(세종 23년) / 보물 제8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