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자씨김영자(68ㆍ근흥면 마금3리ㆍ사진)씨가 흑백사진이 빼곡히 정리된 앨범을 들춰보며 잠시 잠깐 잔상에 젖었다.
이미선
죽은 줄만 알았던 이복여동생이 살아 있다는 말에 언니 김영자(68, 근흥면 마금3리)씨는 그저 흐르는 눈물을 감출 길이 없어 보인다.
멀고 먼 나라 독일로 돈을 벌겠다며 떠난 동생. 세월의 풍파와 세간의 뒤안길, 그래도 모진 핏줄은 자매의 연을 다시금 잇게 했다.
결혼과 이민으로 생이별하게 된 영자씨와 영구씨의 사연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영자씨의 '이별' 사연은 자그만 치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성북구 김병준씨의 둘째딸로 태어난 영자씨는 친부가 작은어머니를 들여 살게 되면서 어머니, 친언니와 함께 충남행을 택하게 된다.
태안읍내서 정착해 살면서 어머니는 경의정 아래 기약국을 운영하던 전라도 정읍 출신 기성주씨와 재혼하는데. 그 사이 딸(기영구)과 아들이 태어난다.
아들은 열 살 되던 해 친구들과 장명수저수지로 물놀이를 갔다 익사했고 기영구(58·그리스 테살로니키주)씨만이 영자씨 자매와 살게 됐다는데.
당시 영자씨는 지금의 K마트자리 중앙병원에 근무하며 동생 영구씨의 뒷바라지를 했고 영구씨가 공주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지금의 남편 이원진씨와 결혼하게 됐다.
공주간고를 졸업한 영구씨는 서산의료원에 취직해 일하다가 당시 월급이 4만 원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제안의 홍외과로 옮겨 간호사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그때 둘째 딸을 임신했던 영자씨는 임신스트레스 등으로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때마침 찾아온 영구씨가 이런 영자씨의 병간호를 도맡았다고.
"우울증이 심해 하루는 농약을 먹고 토해 이틀간 의식이 없던 적도 있었어요. 그때 우리 신랑이 양조장 차를 운전했는데 연포로 배달을 갔다는 거예요. 저를 돌봐줄 사람이라곤 영구뿐이었으니까… 영구가 독일로 가기 전에는 제 병간호를 도맡았죠."영구씨는 이후 동창들 20~30명과 함께 서울개발공사 3개월 연수과정에서 독일어를 배운 뒤 독일로 떠났다. 당시 우리나라 남자들은 광부로 여자들은 간호사로 독일에 파견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는데. 영자씨 기억에 영구씨도 3년 계약으로 독일행을 택했다고 했다.
"영구가 떠날 때만 해도 독일 물가가 비싸 옷가지며 생활용품을 전부 준비해 가야 했는데, 그땐 저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집에 손을 벌릴 수 없던 상황이라. 딸 돌반지를 팔아 미숫가루 1말을 해준 게 전부였어요."가난했고 배고팠던 그 시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멀리 떠나는 동생 옷 한 벌 해줄 수 없던 시절을 원망할 수밖에. 독일로 건너간 영구씨는 조카들에게 먹일 초콜릿이며 옷가지 등을 부쳤다고 했다.
또 때때로 어머니에게 드릴 돈과 편지를 보내 독일생활을 전했다는데 어느 때인가부터 소식이 끊기더니 점차 소식이 뜸해졌다.
"영구 나이 스물셋에 독일에 갔는데, 그때 제가 논을 살일 이 있어 200만 원을 부치라고 했던 게 기억나요. 그게 부담스러워 연락이 없던 건 아닌 가 생각이 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