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대통령, 우리말 두고 영어로 연설했어야 하나?

등록 2013.05.09 17:35수정 2013.05.0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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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8일 오전(현지 시각)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34분 동안 영어로 말해서 화제다. 영어 발음이 좋네, 고급 외교술입네 부터 아니네 콩글리시네 하면서 말들이 많다. 나도 여기에 한 마디 보태려고 한다.

대통령은 이번 의회 연설에서 한미 동맹이 왜 중요한지, 북한의 핵 보유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힘주어 말해 40여 차례나 손뼉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7일에도 미국 대통령과 통역 없이 산책을 했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대통령의 영어 실력은 미국 대학 졸업자 수준으로,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쯤 해서 그게 무슨 문제냐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영어로 할 수 있으면 영어로 말하는 게 소통하는 데 더 좋지 않으냐? 듣는 사람이 편하고 친근하게 느끼게 하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겠냐? 이렇게 대답하겠다.

무엇보다 먼저 대통령의 의회 연설이 어떤 성격의 자리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앞날인 7일, 산책하면서 주고받는 말이야 영어라면 어떻고 우리말이라면 또 어떻겠나. 하지만 미국 의회 연설은 외교 활동의 하나이며, 외교 활동은 엄연한 공식 자리다.

헌법 제66조에는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고 나와 있다. 국어기본법 제4조에는 '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변화하는 언어 사용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국민의 국어능력 향상과 지역어 보전 등 국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로서 누구보다 우리말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앞장서야 할 사람이다.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해도 우리말로 말하고 통역을 하게 했어야 한다.

대통령은 개인이 아니라 주권 국가의 지도자이다. 마땅히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의 이익을 맨 앞자리에 두어야만 한다. 대통령이 영어를 어떻게 공부를 했든 얼마나 막힘없이 잘할 수 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영어뿐 아니라 어느 나라 말이든 공부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말을 우리 스스로가 존중하지 않을 때 우리말은 설 자리를 자꾸만 잃어갈 것이다.

영어는 수많은 공용어 가운데 하나일뿐이다. 백 걸음 물러나 미의회 의원들과 소통을 하겠다는 마음이 무엇보다 강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대통령부터 우리말을 저버리고 몰라라 한다면 우리말의 뒷날은 컴컴할 뿐이다.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세상에서 그대로 길들여져 살아간다. 어른들이 우리말을 지키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국어기본법 같은 법 같은 거 없어도 아이들은 우리말을 소중히 지켜갈 것이다.


글 마치기 전에, 오는 15일은 스승의 날로만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날은 세종이 태어난 날이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훈민정음 서문에서 말했다. 나처럼 영어 말벙어리인 사람은 내 나라 대통령이 하는 말조차도 자막으로 읽어야만 하는가. 그래서 작게라도 비명 한번 질러본 거다.
#우리말 #박근혜 대통령 #미국의회 연설 #영어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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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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