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제 삶처럼 무거운 장작을 가지고. 그것도 맨발로.
홍성식
[장면 하나] 엄마를 위해 무엇을 해봤던가? 위 사진은 2011년 4월 6일 새벽 6시 10분경에 찍은 것이다. 전날 루앙프라방을 출발한 '슬로우 보트'가 중간 기착지 팍뱅에 해질 무렵 도착했고, 극장과 서점은 물론, 그럴싸한 놀이문화 하나 없는 그 마을. 라오스 토속주 '라오라오'에 맥주 섞어 마시고 일찍 잠자리에 든 터라 새벽에 잠이 깼다. TV도 없는 낡은 호텔방이 무료해 강가로 산책을 나갔다.
거기서 보았다. 엄마는 다 떨어진 고무 슬리퍼, 아들은 맨발인 모자(母子)가 산에 가서 베어온 것인지 적지 않은 장작을 쌓아놓고 커다란 바구니에 나눠 담고 있었다. 산악지대가 대부분인 라오스 북부의 4월 새벽은 한국의 늦가을처럼 춥다. 양말도 신지 않은 두 사람의 발은 분명 시렸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아, 그때처럼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엄마는 자기 바구니에, 아들은 제 바구니에 더 많은 장작을 담으려 하고 있었다. 서로 무거운 걸 들고 가겠다는 소리 없는 싸움. 엄마와 아들은 장작을 이고 지고 또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하는 걸까?
자꾸만 엄마는 아들 바구니에서 장작을 꺼내 자기 몫으로 가져가려 하고, 이제 겨우 10살 남짓의 아들은 그걸 제지하며 엄마의 바구니에서 장작을 다시 꺼내기에 바빴다. 한참 동안이었다. 아름다운 실랑이. 바라보는 내 목구멍이 휘발유를 삼킨 듯 뜨거웠다.
그리고, 기억의 회로를 뒤로 돌렸다. 40살이 넘은 내가 여전히 '엄마'(어머니가 아닌)라고 부르는 한 여자가 불현듯 떠올랐다. 공자가 말한 바 세상사 미혹에서 자유스러워진다는 '불혹(不惑)'이 되기까지 단 한 번도 엄마가 진 세상사 무거운 짐을 나눠 들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하여, 10살짜리 꼬마만도 못한 나는 그토록 착한 아들과 선량한 엄마 앞에서 감히 사진기 따위를 들이댈 수가 없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면 99%의 라오스 사람들이 그렇듯 그 모자도 하던 일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카메라 앞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내가? 그리고, 감히 어떤 이가 있어 그 '위대한 다툼'에 주제넘게 개입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이유로 사진은 언덕을 오르는 엄마와 아들의 뒷모습만이 담겼다. 그들은 집으로 가는 길에 얼마나 자주 마주보며 웃었을까? 내 남은 생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모자의 뒷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 같다.
[장면 둘] 착한 것도 이 정도면 병이다라오스라는 나라는 딱 한 마디로 정의가 가능하다. '착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부연이 필요 없다. 가보면 안다. 심지어 관광객을 상대하는 닳고 닳은 장사꾼도 보통의 한국 사람보다 훨씬 순박하고, 친절하며, 선량하다.
루앙프라방에 산재한 수많은 싸구려 호텔. 그중 내가 묵은 곳 인근 구멍가게를 자주 드나들었다. 아들 내외, 손자, 손녀와 함께 사는 할머니. 새벽 5시면 가게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담배를 사기 위해 그 가게에 갔을 땐 10여 명의 가족이 이른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담배를 사서 나오려는데 이 할머니, 자꾸만 나를 붙들고 찰밥 한 점(라오스 사람들은 찰밥을 지어 손으로 일정량을 덜어내 뭉쳐 국이나 소스에 찍어 먹는다) 먹고 가란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란 입에 발린 소리를 싫어하는 나다. 차린 게 없는데 뭘 많이 먹나? 그런데, 그날 아침, 정말이지 소박한 식사자리에 끼어 앉아 '차린 것 없는' 밥상에서 먹은 딱 2점의 찰밥 맛을 잊을 수 없다. 찍어 먹은 고추 소스의 향까지. 이제는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내 조모의 정을 그 할머니에게 대신 받았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