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심부름 시키던 아버지, 이제는 그립습니다

[나의 아버지] 한때는 아버지를 원망했었지만...

등록 2013.05.08 10:42수정 2013.05.08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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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한때 지역을 평정했던 주먹계의 보스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호시절'은 결코 길지 않았지요. 박정희 군부정권은 '조폭'의 두목이라는 명목으로 아버지를 구속했습니다.


이 때문에 진즉 사라진 어머니에 더하여 설상가상으로 우리 가정은 풍비박산(風飛雹散)에 이르렀습니다. 할머니께 저의 양육을 맡겼던 아버지는 몇 해 뒤 출감하셨지만, 이미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끝없이 술을 마셔야 살 수 있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입니다. 제가 자랄 당시에는 자정부터 통행금지가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만취한 아버지에게 통행금지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요.

"냉큼 가서 술(소주) 사 와!"

동네에 하나뿐이었던 구멍가게 주인은 저에게 술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만날 외상으로만 술을 가져갈 뿐, 밀린 외상값을 갚지 않으니까요.

"그러지 마시고 소주 한 병만 주세유! 저, 술 못 사가지고 가면 오늘도 잠 못 자유!"


저의 간절한 읍소에도 가게 주인은 냉담하기만 했습니다.

"안 돼! 나는 뭐 땅 파서 먹고 살란 거냐?"


터벅터벅 빈손으로 집에 들어서면, 아버지가 두 눈이 핏발로 벌겋게 돼서 물었습니다.

"술은?"
"못 사 왔슈. 이젠 외상 술 안 준대유!"
"그런다고 그냥 오냐? 다시 가봣!"

다시 간 가겟집은 이미 문이 닫혀 진 후입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콧방귀도 안 꾸던 가겟집 주인아저씨. '아이구, 오늘 난 죽었다!'라는 생각으로 다시 집에 오면 아버지께선 저를 앞에 앉혀 놓곤 하신 말씀 또 하시고 또 하셔서 잠을 한숨도 못 자게 들들 볶았습니다.

잠이란 일단 한번 쏟아지면 무당이 바로 곁에서 '난리굿'을 펴도 못 참는 법입니다. 그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고통은 경험자만이 알 수 있는 어떤 비통(悲痛)이라 하겠습니다. 머리가 더 굵어진 뒤엔 술심부름 시키는 아버지를 안 볼 요량으로 집을 나서면 아예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였습니다.

한데 말이 좋아서 풍찬노숙이지, 그 길은 너무도 험난한 고생길이었지요. 세월은 더 흘러 저도 국민(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여 줄곧 반에서 1등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선 제게 학급 부반장이란 감투를 주시더군요. 4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는 학급회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공부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학교 등록금의 '증발 사태' 원인은 역시 아버지였습니다. 숙부님에게 두 번이나 받아온 저의 중학교 등록금을 아버지가 술로 탕진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술에는 장사가 없는 법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 되자 아버지의 주량에도 변화가 오더군요. 예전에는 한 달 내내 마시던 음주날짜가 건강 이상으로 보름으로 확 줄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가장'이란 임무에 여전히 소홀했으니 우리 부자는 목구멍에 거미줄 치기에 꼭 알맞았지요. 하는 수 없어 저는 학교에 나가는 대신 역전에 나가 구두를 닦았습니다.

이후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주전부리 행상과 노동 등을 해 안해 본 고생이 없을 정도지요. 그처럼 먹고사느라 바빴기에 정작 초등학교의 졸업식 날에도 갈 수 없었고요.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처음으로 연정을 느낀 지금의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살가운 모정에 대한 그리움과 고주망태 술타령인 아버지를 떠나고자, 비교적 어린 나이였던 제 나이 스물세 살에 가정을 꾸렸지요. 이듬해 아들을 낳았으나 아버지께선 과음이 원인이 되어 제 아들이 불과 세 살일 적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저 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공부 잘 하는 네가 서울대 가는 걸 보는 게 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 못난 아비가 네 중학교 입학금마저 술로 먹어치우는 바람에 서울대는커녕 중학교조차 못 갔으니 내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말인데 그동안 말은 안 했다만 정말이지 네겐 평생 미안했다! 나를 용서해라."

아버지의 그러한 유언은 그동안 쌓였던 원망의 먹구름을 걷어낼 수 있었습니다. 제게 유산은 고사하고 빚만 남기고 떠나신 아버지였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아버지를 땅에 묻고 오니 헛헛한 맘이 여간 큰 게 아니더군요. 그래서 아내를 설득해 둘째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녀석이 바로 지난 2월에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딸아이입니다.

지난 2004년 겨울, 딸이 서울대 합격증을 출력하여 주던 날. 그 날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모 의대와 동시에 합격이 되었기에 기쁨이 배가되던 그날, 저는 너무 좋아서 한참을 울었지요.

"잘했다! 고맙다!!"

딸의 자랑스러운 합격증을 아버지도 생존하시어 함께 보셨다면 오죽이나 좋아하셨을까요. 딸도 자랑거리지만, 네 살 위인 아들 또한 제가 팔불출이 아니 될 수 없는 '조건(條件)'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 전에 그 들어가기 힘들다는 대기업에 너끈히 합격했습니다.

내일은 5월 8일 어버이날입니다. 지금은 야근을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날이 바뀌어 내일이 되면 오전에 숙부님이 사시는 아산에 갈 겁니다. 작년에 상처하시어 적적함이 태산과도 같으신 분이시죠. 다행히 건강하시고 제가 받아드리는 약주 역시 잘 드십니다.

저를 볼 때마다 "네가 부모덕을 잘 봐서 많이 배웠더라면 지금쯤은 분명 큰 자리서 일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시는 저의 유일한 혈육이죠. 숙부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언제부턴가 저는 이런 대답으로써 숙부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해 드리고 있습니다.

"타고난 팔자는 못 고친다고 했잖습니까, 저 대신 딸이 서울대를 나왔고 아들 또한 잘된 건 모두가 박복한 저의 팔자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없었기에 아이들을 제가 못 받고 자란 모정의 설움까지를 덤으로 얹어 아이들을 진정 지극정성과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또한 반면교사의 거울로 치환하여 '나는 아버지와 같이 술로 말미암은 경거망동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겠다!'는 각오를 어떤 신앙처럼 마음에 굳게 새겼지요. 지금도 아이들에겐 절대로 술 심부름을 시키지 않음이 이 같은 제 각오의 방증입니다."

앞으로는 저도 며느리와 사위까지 볼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진정 새로 맞는 딸과 아들로서 후히 대접할 작정입니다. 저에게 한 평생 미안해 하셨다던 아버지를 그립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버지, 이젠 그만 미안해하지 하세요. 저, 지금은 누구보다 행복합니다. 마음 또한 그 어떤 만석꾼조차 부럽지 않으니까요!"
덧붙이는 글 나의 아버지 응모 글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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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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