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이 이 지경까지 된 데에는 역시 북핵문제를 둘러싼 관련국 간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못하고 충돌한 데서 일차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진은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전원 철수가 예정된 지난달 29일 오후, 경기도 파주 경의선남북출입사무소에서 마중나온 관계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경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유성호
신뢰 프로세스의 신뢰성 문제
이제 작금의 사태를 박근혜 정부의 입장에서, 신뢰 프로세스의 틀에서 그 원인을 찾고 해법을 생각해보자. 박근혜 정부 출범 2개월여 만에 개성공단 중단 사태가 벌어진 것에는 박근혜 정부가 통제하지 못한 사태나 의도하지 않은 요인이 작용했지만, 그것으로 작금의 사태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의 역할, 신뢰 프로세스의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정세 악화만 지켜보았다. 박 정부는 이같이 악화된 한반도 정세 속에서도 남북관계만큼은 살려서 협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어야 했다.
현 정부는 대북정책에 대해 대화하거나 협력하려는 노력은커녕, 비난과 압박만이 무성하다. 안보, 강경, 제압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통일부마저 그 대열에 동참하고 고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박 정부는 신뢰 프로세스를 안보와 협력의 균형으로 가동하겠다고 해놓고, 그의 첫 방향을 스스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안보 일변도의 접근을 상황 탓으로 돌린다면 신뢰 프로세스는 머릿속에만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부는 신뢰 프로세스의 두 번째 추진 방향으로 단계적 이행을 제시했는데, 사실 신뢰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언론, 학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았다. 핵심 지적 중 하나는 신뢰 프로세스의 신뢰성 문제였다. 불신이 구조화되어 있는 남북관계에서 북한으로부터 신뢰 프로세스를 어떻게 신뢰받을 것인가. 다른 주변 국가들로부터도 마찬가지다. 대내적인 신뢰 확보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으로부터의 신뢰이다.
대북 제재가 주도하는 국면에서 신뢰 프로세스 가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북에 전달하고 그 징표로 공약했던 인도적 문제 해결과 개성공단 활성화 방안을 밝히고, 이를 위한 당국 간 회의를 제시하고 거기서 북핵문제도 다루는 지혜를 발휘했어야 한다. 인도적 지원과 개성공단 확대는 신뢰프로세스에 대한 국내적 신뢰도를 제고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대통령의 책임과 의무이상의 조치는 실기한 것이 아니다. 우선, 개성공단을 남북 협력과 한반도 평화의 중심으로 살려 더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입장을 진정성과 권위를 갖춰 발표해야 한다. 그리고 개성공단 활성화를 위한 합리적 원칙과 현실적 대안을 내외에 천명하고 이를 위해 북한에 대화를 제의할 필요가 있다.
춘궁기와 만성적 식량부족을 고려해 북한에 10만 톤 이상의 쌀을 지원하는 것도 우리가 관심 두는 인도적 문제 해결 분위기 형성과 북한과의 신뢰 조성에 유익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 대통령은 대북정책을 안보 일변도로 접근하면 박근혜 정부가 추구하는 대북정책이 실패할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안보지상주의는 청와대의 '외교안보회의'라는 이름에서 잘 드러난다. 통일정책은 실종된 채 대북정책이 이 틀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북한의 핵 능력 강화에 즈음하여 안보태세 강화는 누구도 이견을 달지 못하지만, 그것만으로 한반도 평화가 보장되고 남북 화해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주무부서인 통일부에 힘을 실어줘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고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과제를 부여해야 한다. 인도주의적 교역을 시작으로 5.24 조치의 단계적 해제도 검토할 때가 됐다. 신뢰 프로세스의 국제적 지지와 북한의 긍정적 반응 유도 차원에서 박 대통령이 오는 한미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평화적 해결 의지를 피력하길 기대한다.
남북 간 기싸움으로 대중의 생명과 재산이, 우리들의 꿈이 희생당하는 사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위기에서 교훈을 찾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신뢰 프로세스를 위기에서 구할 책임은 박근혜 대통령 자신에 있다. 대북통일정책은 다른 어떤 정책 영역보다 대통령의 철학과 역량에 의존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7.4남북공동성명을 구현할 역사적 책임이 있고 대통령 취임 선서를 준수할 법적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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