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세 주인공. '장희빈' 김태희-'최숙빈' 한승연-'인현왕후' 홍수현(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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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는 어떻게 '성녀'로 만들어졌나
사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정쟁에 희생당한 불행한 인물들일 뿐이다. 각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여성으로서 극과 극의 인생을 강요받았고, 이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차례 힘든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다. 인현왕후가 인내와 희생으로 모든 것을 감내한 '성모'라면, 장희빈은 출세를 위해 악독한 짓도 서슴지 않는 '악녀'로 남아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러한 이미지는 인현왕후 쪽 사람들이었던 서인 세력에 의해 주도적으로 만들어졌다. 인현왕후를 얌전하고 후덕한 조강지처로 표현하고, 장희빈을 욕심 많고 심술 사나운 첩으로 규정함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간 것이다. 김만중이 집필한 대중소설 <사씨남정기>로 시작 된 서인세력의 이 같은 치밀한 '여론전'에 상대방인 남인 측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서인세력은 소설과 함께 "미나리는 사철이요/장다리는 한철이라"로 시작하는 노래 또한 골목골목 퍼뜨렸다. 여기서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를, 장다리는 희빈 장씨를 뜻한다. 즉, 장희빈과 남인 세력의 권세는 한 철일 뿐이고 사철 푸르게 살아남는 쪽은 인현왕후와 자신들이란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네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진 이 노래는 조선 팔도 모르는 이가 없는 유행가가 되어 폭발적 인기를 누리며 민심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처럼 당시의 서인세력은 소설, 노래 등 이른바 '대중문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밑바닥 여론을 훑는데 주력했다. 어렵고 복잡한 정치수사 대신 "착한 조강지처를 내쫓은 못된 첩실을 응징하자"는 단순한 메시지로 일반 백성을 공략했고, 민심을 서서히 변화시켜 이를 재집권의 명분으로 삼았다. 권력을 잡고 있는 쪽은 남인세력이었지만 여론전만큼은 절대적으로 서인세력이 앞서는 형국이 지속된 것이다. 끝내 남인이 서인에게 정권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현왕후에 대한 서인세력의 '이미지 메이킹'은 그녀가 죽은 뒤에도 꾸준히 계속됐다. 특히 궁인이 쓴 것으로 알려진 한글 소설 <인현왕후전>은 필사본만 20종이 넘을 정도로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어 장희빈을 더욱 요사스러운 계집으로 묘사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서인 중에서도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에 비협조적이었던 노론 측은 이 같은 방법을 통해 경종의 정통성에 끊임없이 흠집을 냈고, 종국에는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을 후대 왕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이가 바로 조선 26대 왕 영조다.
재밌는 것은 영조 또한 인현왕후 미화작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무수리였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출신성분에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영조는 이를 만회하고자 인현왕후와 최씨의 인연을 강조하는 전략을 펼쳤다. 착하고 아름다운 인현왕후를 자신의 어머니가 성심성의껏 도운만큼 자신의 정통성에도 전혀 문제가 없음을 은연 중 과시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1694년 인현왕후가 폐출된 이래 무려 100여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 '성녀' 인현왕후와 '악녀' 장희빈으로 고착화 된 이미지는 놀랍게도 21세기에 접어든 현재까지도 여전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1961년 정창화 감독의 영화 <장희빈>을 시작으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 진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일대기는 뚜렷한 선악구도와 확실한 권선징악의 스토리로 인현왕후의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 기존의 구도를 완전히 전복해 버린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 시청자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현왕후는 '역사의 승리자'이처럼 오늘날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의 대명사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한 번 굳어진 여론은 쉽게 돌아서기 힘들고, 한 번 생성된 이미지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 300년 전 '인현왕후 성모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서인들이 이 평범하고도 무서운 진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소름이 돋는다. 정치의 본질은 여론과 언론을 움직이며 명분을 쌓는 것임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승리자 편에 섰던 인현왕후 역시 이 정도 호사는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좋든 싫든, 그녀는 여론전에서 이긴 그 시대의 '승자'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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