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령들에게 제를 올립시다"빨치산 활동하다 토벌대에 의해 돌아가신 분들에 제를 올렸습니다.
변창기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약식으로 영령들을 위로하는 제를 올렸습니다. 다시 전망대에 올라 쉬었다가 이번엔 파래소 폭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갈지자로 된 좁은 길은 가파른 곳이었습니다. 파래소 폭포에서 그시절 밥도 지어먹고 빨래도 하고 그랬다 합니다. 파래소 폭포는 울산 8경으로 이름난 곳이어서 사람들 발길이 많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구연철 할아버지도 다른 사람들 처럼 양말을 벗고 폭포수에 물을 담갔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잠시 구경하고 산을 내려갔습니다. 저는 내려 갈적에 구연철 할아버지 곁에서 걸었습니다. 그리고 궁금한 이야기를 질문했습니다. 우선 감옥살이는 어땠는지 물어봤습니다.
"지리산·태백산·신불산 일대에서 6년 동안 유격대 활동과 내가 신불산에 들어온 지 4년 동안 많은 동지들이 토벌대에 살해됐어요. 다른 지역과 연락도 두절되고 했지요. 몇몇 남은 동지들은 마을에 들어가 살면서 우리의 활동을 이어가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부산에 가서 시민증 발급받으려고 사진 찍으러 갔다가 사진관 사장의 신고로 붙잡혔지요."구연철 할아버지는 한숨을 길게 쉬었습니다. "젊은 나도 힘든 산행을 잘 하시는거 보니 아직 몸이 건강 하신가 봅니다"고 말했더니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습니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속은 골병이 다 들어 있습니다. 54년에 잡혀 들어간 후 74년까지 20여 년간 옥살이 하면서 전향서 안쓴다고 온갖 고문과 폭행을 받아서 몸이 성치 못해요."구연철 할아버지는 감옥을 지옥이라 표현했습니다. 경찰이 불러다 고문이나 폭행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일반 잡범 중 죄질이 무거워 무기징역이나 사형수를 감형해준다고 하는 말에 사상범을 쥐잡 듯했다는 것입니다.
"폭력배나 무기징역 받은 살인자로 복역 중인 사람만 모아 놓은 곳에 우릴 쳐넣어요. 그리고 전향서 받아내면 감형시켜 준다고 하니 우릴 말못할 폭행을 매일 자행했습니다. 기절하고 초죽음이 돼도 그들의 폭행은 멈추지 않았어요. 그렇게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면서도 전향서를 쓰지 않았어요. 교도소 소장은 감형은 커녕 다른 교도소로 이감해 버렸어요. 이용만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죽도록 폭행한 사람 중 한 사람이 교도소 안에서 자살해버렸어요."구연철 할아버지는 구속될 당시 20살 청년에서 출소 할 때는 40살 중년이 돼 있었습니다. 출소 후에는 '자유 대한민국'에서 자유로이 살았을까요?
"말도 마세요. 수시로 경찰에서 오라가라 해서 직장 생활도 제대로 못했어요. 또, 직장 구해서 다니나 싶으면 사장에게 나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으니 사장인들 저를 쓰려 했겠어요? 세월이 흘러 잠잠한가 싶었는데 어느날 통장이 와서 '당신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경찰이 매일 당신에 대해 확인 전화를 해?' 하고 저에게 와서 그런 후에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그러니 동네에서 살 수가 있어야죠. 이 동네 저 동네 이사를 일곱 번이나 한 적도 있었습니다."아내와 자식에게 면목이 없다고 구연철 할아버지는 고개를 떨궜습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위해는 고스란히 가족에게도 고통으로 다가섰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순박하고 작은 체구로 어찌 그리 살아 오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중간쯤 내려가시다 무릎이 아플 할아버지를 진행하는 분들이 승합차에 태워 가셨습니다.
"지금 정세, 해방 후와 다를 게 없다"<신불산>이란 책을 보면 구연철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아 오셨나를 알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어린 나이로 일본 탄광촌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찾아 나서면서 한 고생, 해방된 후 다시 고향에 돌아와 겪은 사연들. 미국과 이승만과 친일관료들의 호강을 이어가기 위해 민초들은 수없이 살해되기도 했고 구속되기도 했던 상황에서 빨치산이 돼야 했던 처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고 구속된 폭력배와 양아치로부터 폭행과 폭언을 들으며 감옥살이를 해야했던 사연. 출소하고서도 자유롭지 못했던 인생 길. 어느덧 그분의 나이 84살이 됐다고 합니다.
"60년 전 산에 있을 때 품었던 희망을 저는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산행을 즐기러 온 게 아니라 당시 치열했던 항미 유격대 활동의 정신을 가슴깊이 새기려고 온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정세는 해방 전후와 다를 바 없음을 느끼고 있습니다."구연철 할아버지는 산에서 내려온 후 뒷풀이 마당에서 그렇게 마지막 이야기를 풀어 냈습니다. 1950년대 좌우대립으로 전쟁까지 발발된 그 당시로 시계가 멈춘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망대에 세워진 토벌대가 공비를 소탕했다는 작은 비석문을 보면서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음을, 토벌대와 항미 유격대의 격전도 60년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한반도 좌우대립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신불산 평화통일기행 하면서 알 거 같았습니다.
저는 한반도에 사는 같은 말을 쓰는 사람 끼리 왜그리 서로 헐뜯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상이나 이념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아 가는 것일진데 말입니다. 휴전협정을 중단되고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흘러 넘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