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부터 환경운동을 시작한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가습기살균제 사건처럼 피해자가 많이 발생한 환경사건은 처음봤다고 말했다. 석면문제, 페놀사건 등도 굵직굵직한 사건이 있긴 했지만 1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발생시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최 소장의 설명이다.
이기태
최 소장은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처음 접한 날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모들의 원인미상 폐질환의 원인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가습기살균제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는 2011년 4월 임산부들이 갑작스레 원인 미상의 폐질환으로 사망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전문가들은 바이러스 침투 등 다양한 추측을 내놨지만, 중환자실에 입원한 산모들은 원인도 치료방법도 찾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는 이들 사건을 두고 원인 미상의 중증폐질환이 원인이라고 밝혔다.
"정부조사 내용을 봤더니 어떤 가습기살균제 제품인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황당했지요. 계속 가습기살균제를 쓰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추가적인 피해자들을 막기 위해 그 다음날 제품명을 공개하라는 성명서를 내보낸 게 센터에서의 첫 활동이었습니다."성명서가 나간 뒤 환경보건시민센터 사무실로 피해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산모뿐 아니라 영유아들의 피해가 많다는 제보들이 잇따랐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환경보건시민센터는 가습기살균제 제품 20종을 발표했다.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가습기당번, 롯데마트의 와이즐렉, 애경의 가습기메이트, 홈플러스의 가습기청정제 등 알만한 기업 제품이 수두룩했다.
50년 전 독일보다 후진적인 대한민국의 현실 1980년대 후반부터 환경운동을 시작한 최 소장도 "이처럼 피해자를 많이 낸 사건은 처음봤다"고 말했다. 그는 "석면문제·페놀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있긴 했지만 정작 피해자가 확인되고 100명 넘게 사망한 사례는 하나도 없다"며 "그나마 1960년 독일에서 불거진 탈리도마이드 사건이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비슷하다"고 전했다.
탈리도마이드는 1950년 후반 독일에서 진정제로 만들어진 약으로 임산부의 입덧방지제로 널리 사용됐다. 동물실험 결과 부작용이 없어 안전하다고 판명돼 독일을 비롯한 50여 개 국가에서 많은 임산부들이 이 약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이 약으로 인해 1만 여명의 아이들이 사망하거나 손·다리가 짧은 기형아로 태어났다.
최 소장은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계기로 임신 중 특히 초기 3개월은 약을 조심해야 한다는 게 상식이 됐다, 그렇다면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피해대책 부분에 있어선 50여 년 전 발생한 탈리도마이드 사건과 만 2년 전 발생한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별로 다르지 않다, 2년이 지났는데 조사도 진행 안하는 걸 보면 50여 년 전보다 더 후진적"이라고 지적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고사례는 현재(4월 24일 기준) 사망 120건 등 386건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존 질병관리본부와 환경보건시민센터로 접수된 359건(사망 112건)에서 최근 추가 피해신고사례까지 포함된 수치다. 최근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문의하고 신고하는 연락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피해조사는 기약 없이 멈춘 상태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발생하고 1년이 지난 지난해 말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 진상규명을 위한 폐손상조사위원회를 꾸리고 가습기살균제 피해 의심사례로 접수된 사례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폐 CT 검사·폐기능검사 등의 후속 조사를 벌이겠다는 조사위원들의 뜻을 복지부가 거부하고, 조사위원들이 일괄 사퇴하면서 조사 진행이 중단된 것.
'조사위원들이 주장하고 있는 피해자 후속 조사가 없다면 애당초 조사는 무의미하다'는 게 최 소장의 견해다.
"이미 사망하거나 폐이식할 정도의 중증 피해사례에 대한 조사는 어느 정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중증환자의 경우예요. 피해접수 사례의 절반 이상이 경증환자일 텐데 그에 대한 조사가 없습니다. 만약 중증환자의 판단기준으로 경증환자를 판단한다면 '가습기살균제 피해가 아니다'라고 결론 내릴 우려가 크지 않을까요. 그래서 중증환자들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전체를 조사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단 문제제기가 나왔고, 폐CT검사뿐 아니라 폐기능까지 놓고 전반적인 평가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피해조사를 담당했던 복지부를 비롯해 가습기살균제 피해와 관련이 있는 환경부·산업통상자원부(옛 지식경제부) 등은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만 급급한 상황이다. 하루 빨리 마련되고 지원돼야 할 피해대책이 정부 부처들의 '권한 밖'이라는 한마디에 거론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최 소장은 "정부는 부처 간의 영역과 권한, 이런 얘기를 하는데 솔직히 일반 시민이나 피해자들이 보기에는 웃기는 얘기"라며 "어차피 정부는 하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각 부처마다 고유 영역이 다른데 (부처별로) 걸쳐있는 범부처적인 성격이 한두 가지인가, 그러니까 총리실에서 조정해주고 대통령이 국무회의 때 지시해주는 것 아닌가"라며 "어떤 의미에서는 대통령과 국무총리도 이 사건에 있어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부처 간의 소통 등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무총리·대통령이 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사람이 죽고, 가정이 완전히 망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