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근대문화유산 명패, 1962년의 정병욱 가옥 모습, 정병욱이 보관했던 윤동주 자선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연희전문시절의 윤동주(좌)와 정병욱(우)
김종길
굳게 빗장을 지른 철문을 여니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가옥 안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폐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문화재라고 느낄 만한 것은 없었다. 일단 푸념은 뒤에 하기로 하고 바깥에서 보았던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을 먼저 찾았다.
이 가옥은 국문학자로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정병욱(1922~1982)의 옛 가옥이다. 1925년에 지은 이 가옥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유고가 보존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이 없었다면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를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었다.
그럼, 어째서 윤동주 시인의 유고가 이곳 외진 포구에 보존되었던 것일까.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자필원고를 하숙집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맡기고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윤동주는 3부의 자필원고를 만들어 한 권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2부를 은사였던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각각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