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 이후 40계단 모습
40계단 문화관
당시 피난민들은 미군 부대에서 버린 음식 찌꺼기를 모아 파는 '꿀꿀이죽' 장사, 미제 빈 깡통을 펴서 판잣집 지붕을 이어주는 '깡깡이' 장사,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를 주워 땔감으로 파는 '전마선업', 철길에 버려진 코크스(cokes)나 철도 화차에서 떨어진 석탄을 훔쳐와 역시 땔감으로 파는 일, 골목을 돌며 머리를 깎아주는 떠돌이 이발사, 하루하루 품삯을 받는 부두노동으로 생계를 연명했습니다.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마저도 전부 1953년 큰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당시 부산역과 중구 일대에 번진 불로 역은 전소됐고 통신, 교통이 마비됐으며 3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다' 싶었던 삶이 몇 뼘 더 주저 앉았을 때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길거리 곳곳에서 만나는 그때 그 시절 모습에서 감히 당시를 짐작해봤습니다.
노상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린 어미는 당장 오늘을 사는 게 가장 큰 과제입니다. 끼니도 거르고 일 나간 남편이 염려되고, 어찌 됐던 자식들만은 먹이겠다 마음을 다잡습니다. 짧은 휴식에 마른 몸을 누인 아비는 더할 수 없는 고단함을 느끼고, 집에 두고 온 처자식과 불안한 앞날을 걱정합니다. 아이들도 일찌감치 철이 들어 갓난쟁이마저 울음을 참고 소녀들은 야무지게 부모를 돕습니다.
▲지난날 전쟁통에 지독히도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서민들의 모습
이명주
본격적인 마을 구경에 앞서 40계단문화관을 들른 것이 도움이 됐습니다. 사람도 공간도 그것이 살아낸 시간을 이해해야 그만큼 공감하는 것이겠지요. 40계단 가운데 홀로 앉은 나그네가 오늘따라 처량해 보였습니다. 무릎을 숙여 중절모 아래 얼굴을 보기까지 꼭 울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비로 세상은 수채화 톤으로 물들었고 드문드문 불 켜진 간판과 가로등이 간간이 번져 보였습니다.
마음이 싸늘해 찻집을 찾았습니다. 마침 40계단 우측 골목 안 '커피가게 18-1'이란 곳이 보였습니다. 며칠 전 지역 전시 정보를 보며 '가봐야지' 했던 곳인데 너무 쉽게 찾아 어리둥절했습니다. 이곳에선 1년 동안 가게를 다녀간 손님들의 고양이 그림을 전시해 그 수익금으로 동물보호단체를 돕고 있었습니다. 올해로 세 번째라는군요. 고양이를 닮은 여주인이 활달하게 말을 걸어줘 금세 친할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짜이 맛도 훌륭했습니다.
▲40계단 아래 옆골목에 있는 작은 커피가게
이명주
여주인 덕에 대여섯 번인가 마주친 개의 사연도 알게 됐습니다. 이름은 꽃님이. 너무 큰 덩치에 눈이 갔다가 너무 깊은 눈빛에 시선이 머무는 녀석인데, 새끼가 차에 치여 죽는 사고를 겪었답니다. 그 후로 자동차나 오토바이 등을 보면 사납게 짖는다고요. 이미 동네 지리도, 주민도 익숙한 듯 여유롭게 거닐며 어떤 이에겐 먼저 다가가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주인은 볼 때마다 안쓰럽고 예쁘긴 한데 길고양이를 못 살게 해 그 점만은 싫다 했습니다.
조금은 귀찮은 마음으로, 또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시작한 여정이었습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공허해질 것만 같은 두려움, 잘살고 있는가 하는 회의, 괜스레 울먹울먹한 마음…. 하지만 중앙동 구석구석을 거닐며 과거와 오늘이 뒤섞인 풍경을 음미하고 새로운 인연과 만나면서 다시금 따뜻한 감동이 찾아왔습니다. 짧던 길든, 가깝던 멀든 모든 여행은 그렇습니다. 자꾸만 길을 걷는 이유입니다.
▲눈빛이 깊은 꽃님이
이명주
▲조영훈 님 소원돌. 18-1 카페 갤러리에서.
이명주
소원돌 신청 방법 :
gaegosang@naver.com, 오마이뉴스 쪽지, 페이스북(/2012activist) 메시지를 통해 간절한 소원 하나, 사는 곳과 나이, 이름을 알려주세요. 소원돌 인증샷을 받을 연락처도 함께.
마음의 힘을 믿고 세상 모든 것이 연결돼 있음을 알고 당신의 착한 소원에 간절한 마음 하나 더하겠습니다.
정보 |
40계단문화관의 운영시간은 평일 오전 10시~오후 6시, 주말 양일 오전 오전 10시~오후 5시입니다. 휴관일은 월요일과 공휴일입니다. 커피가게 18-1의 고양이 그림 전시전은 오는 27일까지 열립니다. 그림은 1절당 3천 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꽃님이'는 절대 물지 않습니다. 행여 만나면 겁먹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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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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