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살해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다!" 오는 4월 18일 저녁 6시부터 보신각에서 진행되는 '여성살해 중단을 촉구하는 4.18 지구지역 공동행동 촛불문화제' 포스터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여성살해의 유형은 무엇일까? 연쇄살인? 강간살해? 아니다. 여성살해의 가장 일반적인 유형은 바로 '가정폭력'과 '친밀한 관계에 의한 살해'이다. 남편이나 전 남편, 애인, 전 애인 등에 의한 살인이 가장 많은 것이다.
2012년 WHO의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35% 이상의 여성살해가 친밀한 관계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최근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지난해 보도된 사건 분석만으로도 남편이나 남자친구에 의한 살인사건이 최소 169건, 그로 인해 살해당한 여성은 120명에 달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살인 미수나 보도되지 않는 사건들까지 고려하면 3일에 한 번도 아닌 이틀에 한 번 꼴로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의해 죽어가는 여성들이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나라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2012년 미국에서는 살해당한 여성들 중 40~50%가 친밀한 관계에 의해 살해를 당했는데, 이는 매일 4명의 여성들이 남편이나 애인에 의해 살해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에서 역시 2012년 1~2월 중 언론에서 보도된 사건만 하더라도 149건의 여성살해 중 85건이 가정폭력에 의한 살해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6시간마다 한 명 꼴로, 스페인에서는 이틀에 한 명 꼴로 파트너에 의한 살해를 당하고 있으며, 인도에서는 정부의 공식 통계상으로만도 매년 5천 명의 여성들이 이렇게 죽어가고 있다. 게다가 인도의 이 통계는 인도에서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채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명예살인이나 지참금 살해의 수치를 매우 낮게 어림잡은 수치에 불과하다.
더욱 끔찍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이별을 통보했거나 청혼을 거절했다는 등의 이유로 파트너나 구애했던 남성으로부터 염산테러를 당하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염산테러는 이제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파키스탄, 인도 뿐 아니라 홍콩, 영국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도 염산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남편과 애인에 의한 폭력 뿐 아니라 가족 전체에 의한 여성살해도 벌어진다. 중동이나 서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는 종교적, 문화적으로 규제되는 가부장적 성규범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혼 전에 남자친구들을 많이 만났다거나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 의한 명예살인이 벌어진다.
전 지구적 현상여성살해의 맥락에서 주목해 보아야할 수많은 유형들 중에서도 가정폭력과 친밀한 관계에 의한 살해, 가족에 의한 살해가 이렇게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첫째는 살해 동기가 아주 일상적인 권력관계와 지속적인 폭력으로부터 이어진다는 점이다. 여성살해의 가해자들은 대부분 일상적으로도 남성적인 권력과 힘을 과시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사람들이며 상대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고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이들이었다. 가족에 의한 명예살인 역시 매우 강력한 가부장적 통제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폭력은 사랑의 이름으로, 때론 가족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묵인되고 방조된다. 심지어 파트너에 의한 폭력이나 학대를 경험한 바 있거나, 관계를 끊으려고 했던 여성들, 임신한 여성들에 대한 여성살해는 점점 증가하고 있지만 여성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일단 사회적, 물리적 조건들이 상대적으로 여성들에게는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다가, 무엇보다 사회는 여성들에게 적극적인 의사표현이나 거부, 대응보다는 수동적인 인내와 헌신적인 사랑, 남성과 가부장에 대한 복종을 여성 섹슈얼리티의 모델로써 요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성들은 폭력과 구애가 반복되고 구타가 곧 사랑표현이 되어버리는 가정폭력의 패턴에서 더욱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둘째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로, '거리는 위험지대, 가정은 안전지대'라는 인식이 가진 함정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사회가 특정한 사회부적응자, 심리적인 사이코패스, 성적 욕망을 참지 못하고 여성혐오로 가득 찬 살인마의 이미지만을 만들어내는 동안, 우리 일상 속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가부장적 폭력과 여성혐오는 드러나지 않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어디든 안전하지 않으니 여성들은 어디서나 조심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강력범죄의 대책만을 찾기 이전에 사회가 당연한 듯 전제하고 있는 가부장적 구조와 문화, 인식부터 바꾸어 나가지 않는다면 여성살해의 현실은 바뀌기 어렵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여성살해의 또 다른 배경중남미에서는 특히 페미사이드의 맥락이 더욱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중남미의 페미사이드(feminicidio)는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여성들에 대한 광범위한 규모의 조직적 살해와 혐오범죄의 양상을 뜻할 뿐만 아니라, 이를 방조하는 정부와 경찰 등 공권력의 태도까지 포함하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중남미의 남성중심적 문화와 조직적 갱단, 마약거래, NAFTA 체결 이후 더욱 극대화 된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 그리고 이 모든 현실에서 경제적·사회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여성들이 대규모로 중남미 여성살해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과테말라에서는 2009년에만 847명의 여성들이, 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는 5027명의 여성들이 살해를 당했다. 게다가 이 수치는 가정폭력으로 인한 살해는 제외한 수치이다.
또한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지대이자 NAFTA 체결 이후 전 세계의 기업과 자본, 중남미 전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밀집하고 있는 마낄라도라 공장지대가 있는 멕시코 후아레스에서는 1990년대부터 지난 10년 간 최소 400명에서 500명의 여성들이 피살되거나 실종되었으며 그 중 대부분의 사건들은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신자유주의로 인한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지참금 살해(결혼 지참금 문제로 인한 살해)' 역시 더욱 증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보아서는 이 여성들이 단지 조직범죄나 여성혐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배경에는 신자유주의로 인해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마낄라도라에서 실종되거나 살해당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일자리를 찾아 중남미 전역에서 이주해온 10대, 20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이주민으로서 처한 불안정한 환경과 차별이 이 여성들의 경제적·사회적 삶과 지위를 더욱 열악하고 위험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여기에 남성우월주의와 인종주의, 양극화된 사회에서의 폭력과 사회적 비리, 부패한 공권력의 방조와 무관심이 중첩되어 이 엄청난 여성학살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과테말라의 경우에도 마약거래나 범죄조직에 의한 여성살해가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내전 이후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상황 속에서 일자리를 찾거나 사회적 활동을 하는 여성들에 대한 혐오와 경계의 맥락으로 벌어지고 있는 가정폭력과 살해 사건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2008년 1월에서 8월까지 벌어진 여성살해 중 61%의 사건이 가정폭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238명의 여성살해 피해자 중 45%가 피해여성의 집에서 살해를 당했다.
그 밖에도 캐나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원주민 여성의 실종,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결혼 이주여성이나 여성 이주 노동자 살해 또한, 해당 지역의 여성들에 대한 가부장적 폭력 뿐만 아니라, 자본의 세계화 속에서 여성들이 처해 있는 경제적 빈곤과 열악한 사회적 지위, 인종적 편견이 함께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 섹슈얼리티의 단속과 통제를 위해 벌어지는 여성살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