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법대전 중 학설휘찬, 16세기 판의 첫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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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도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학설휘찬>인데, 이것은 법원칙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된다. 후대의 법률가들은 어려운 법률문제가 있을 때, 자연스럽게 이 책을 찾아본다. 그러면 로마의 위대한 법학자들이 이와 유사한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접근했는지가 나온다. 그러면 후대의 법률가는 자연스럽게 그것에 근거하여 법적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식으로 로마법은 후대의 법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로마법이 세계의 법률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중세 이후의 로마법의 재발견, 이를 이은로마법의 계수(繼受)에 있다. 로마법의 재발견은 주로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린 독일이 주도하였는데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독일은 13세기 이후 중앙 권력인 황제의 권력이 점점 약화된 반면 7명의 지방 선제후가 점차 권한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이런 연유로 지역의 법이 국가(중앙)의 법에 우선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등 법적 안정성이 매우 훼손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근대 유럽의 법질서에 영향력을 발휘한 로마법한편, 독일 황제는 신성로마황제로서 과거 로마황제의 후예라는 인식이 강했다. 따라서 독일제국 내에서는 로마법이 (신성로마)황제의 법이라고 간주하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독일제국 내의 모든 법원에서 로마법을 적용해야 하고, 법률가들은 로마법을 배워야 한다는 의식으로 연결되었다.
로마법이 독일제국 내에서 본격적으로 통일법 운동으로 연결된 것은 18세기 이후 역사법학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독일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 역사주의가 성행했는데 이것은 법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역사 속에서 생성, 소멸한다는 것으로 역사 외적인 이성이나 자연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와 성격을 달리하는 학문운동이었다.
따라서 사비니(1779-1861)와 같은 법학자에 의하여 주도된 역사법학에서는 독일 민족의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 고유의 법을 찾는 것이 법학자의 주요한 과제였다. 여기에서 로마법이 재발견된다. 로마법이 독일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고유의 법이라는 것이다. 로마법을 공부하고, 이를 현실에서 적용해야 하는 당위성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로마법은 역사법학자 외의 영역에서도 환영 받을 소지가 많았다. 왜냐하면 로마법의 보편성 때문이다. 로마법은 속성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법을 지향했기 때문에 합리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통일법 운동에서도 역사적 법원(法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중세 이후 유럽의 그 어지러운 정치질서를 극복하고 각 국가가 통일 민족국가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로마법은 인간이성의 주요한 증거로서 자연스레 중요시 될 소지가 컸다.
이런 이유로 로마법은 근대 유럽의 법질서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19세기 서구 법제사에서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불리는 나폴레옹 민법전(1804)은 그 제정과정에서 로마법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민법전을 만든 사람들은 이 법전을 만듦에 있어 가장 많이 감사해야 할 사람은 로마인들이라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혔다. 그리고 많은 주석가들이 프랑스 민법의 각 조문의 그 역사적 연원을 로마법에서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