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결혼을 앞둔 김용찬군과 장은진양이 주례를 청하기 위해 큰절을 하고 함께 주례를 설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안수
오늘(4월 1일), 모티프원에 아주 특별한 방문이 있었습니다. 김용찬군과 장은진양이 그들입니다. 올 5월 4일 결혼을 앞둔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먼저 사양의 손을 내젓는 소엽 선생님과 저를 앉히고 큰절부터 했습니다. 푸른 젊음을 가진 두 사람의 방문 목적은 주례를 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례를 요청하기 위한 큰 절을 두 사람에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결혼에 주례를 두 사람이 맡기로 한 까닭입니다. 사연은 이렀습니다.
신랑 김용찬군의 아버지, 김대영 선생은 용찬군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십 수 년 전에 스스로 구도자의 길을 걷기위해 출가했습니다. 법명은 '야초'. 서예가 소엽 신정균 선생은 야초스님이 속가에 있던 때에 인연을 맺은 분으로 야초스님의 속가시절과 출가 후의 만행에 함께 구도하는 마음으로 인연을 계속했습니다. 그 세월이 올해 만 15년입니다. 야초스님의 속가(俗家) 아들 김용찬군이 10여 년 전, 군에 입대하면서 소엽 선생께 요청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결혼을 할 때 주례를 맡아 주십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엽 선생은 흔쾌히 승낙했고, 그 청년이 마침내 배필을 찾아 혼인을 앞두고 그때의 약속에 따라 주례를 요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소엽 선생은 그 혼례가 그동안의 변화된 관계를 반영하고 좀 더 창의적이고 감격적인 혼례식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저와 함께 주례를 담당하고 싶다는 '더블 주례'를 제의하신 것입니다.
소엽 선생은 저와 야초스님과도 7년 동안 구도하는 한 가지 마음을 서로 나누어왔으니 이 더블 주례가 신랑과 신부에게 결혼생활에 대한 더 확고한 울림의 기준을 전할 수 있을 거라는 의견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신랑·신부 당사자뿐만 아니라 양가 부모님과 친지들이 모두 관여되는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 만큼, 기존의 형식과 관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 부모와 하객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드릴 수도 있으므로 그 뜻을 확인받도록 했습니다. 양가 부모님은 이 파격적인 형식에 대해 큰 기쁨으로 반긴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신랑과 신부가 될 두 사람이 직접 방문한 것입니다.
김용찬군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경우입니다. 아버지의 엄한 기준에 따라 새벽 4시에 일어나 무릎을 굻고 명심보감을 외어야했습니다.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는 체벌도 뒤따랐습니다. 한번도 '아빠'라고 불러보지 못했습니다. 꼭 '아버지'로만 불러야했습니다.
그리고 용찬군이 가장 예민한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는 가족들의 뜻에 반하여 홀로 구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용찬군은 흔들림 없이 어머님을 지켜드리면서 장한 청년이 되어 스스로의 힘만으로 청년 사업가로 섰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버지의 입장을 가장 깊이 헤아리는 효자가 되었습니다. 용찬군은 두 사람에게 절을 한 후, 아버지에 대한 애끓는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이번 결혼식을 앞두고 '아버지'는 마침내 저의 '아빠'가 되셨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근엄하게 부르는 대신 더욱 정겨운 '아빠'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 결혼을 앞두고 마침내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용찬군의 눈에 고인 눈물이 두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옆에 앉은 은진양이 그 눈물을 훔쳐주었습니다. 용찬군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주장이셨지만 식장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비워두고 싶지 않은 어머니와 저의 간절한 청을 뿌리치지 못한 것입니다. 딱 3분이더라고요. 아빠는 엄마에게 뿐만 아니라 제게 참 엄하고 호된 말씀을 많이 하곤 하셨는데 우리가족 모두가 성직자의 방식으로 살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제가 청소년이었을 때 그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 비수 같은 말로 반항하기도 했었습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아빠의 그 가혹하다고 느낀 말씀들에 저항하지 않고 딱 3분을 참으니까 그 말씀들이 모두 옳더라고요. 모두가 귀한 말씀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 최대한 잘하고 싶어요." 용찬군은 이미 스스로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가족의 어떤 어려움도 출가한 아버지에게 토로하거나 기댈 수 없는 상황에 좌절하는 대신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해낼 수 있고 이성과 의지를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는 독립심을 가진 페르소나(persona)가 되었습니다. 고난이 오히려 용찬군의 스승이 된 셈입니다.
신랑의 눈물을 자신의 손바닥과 손등으로 쓱쓱 문질러 닦아주는 은진양은 독일에서 나고 그곳에서 자란, 극히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처녀였습니다. 사업하는 아버지의 사업장이 그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