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아이콘' 만주족? 틀려도 한참 틀렸다

[서평] 스기야마 마사아키의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등록 2013.04.03 16:29수정 2013.04.03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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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겉표지.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겉표지. ⓒ 시루

여기 두 가지 짤막한 질문이 있다. 재빠르게 답을 떠올려보기 바란다.

질문① '민족'이 먼저일까, 아니면 '국가'가 먼저일까?
질문② '만주족'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당신이 '질문 1'에서 '국가'를 택했다면, 당신은 아마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의 저자스기야마 마사아키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민족'을 답으로 떠올렸다면, 이 책의 저자는 당신에게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국가'나 '민족' 모두 역사의 생성물이다. 변질이 되기도 하고 소장(消長)·생멸(生滅)된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국가'가 앞서고 '민족'이 뒤에 성립된다. 처음부터 확고한 '민족'이 존재하고 '국가'가 나중에 만들어진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본문 401쪽)

저자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기 힘든가.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한 구체적인 예를 따라가면서 조금 더 살펴보자.

순수 유목민으로 구성된 국가, 과연 있었을까

당신은 '중화 민족'이라는 개념이 언제 생겨났다고 보는가.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秦)'일까, 아니면 과거 중국 역사의 전성기였던 '당(唐)'이었을까. 이 용어는 놀랍게도 근대에 들어와 손문(孫文·1866~1925) 등이 제시한 개념으로 그 역사가 길지 않다.


저자에 따르면, '중화'라는 문명의 핵심은 오래 전에  황하의 중·하류 지역에서 싹텄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 현상의 기원과 관련한 대상으로나 탐색이 가능한 것이지 원래부터 어떤 실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견해다.

일본 내 몽골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저자가 보기에 '민족'과 '국가'의 선후 관계를 제대로 짚는 일은 올바른 역사 인식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말의 개념은 그 역사가 이제 20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근대 서양에서 만들어진 틀과 가치관을 기초로 한다. 서구 중심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 개념이 '유목 민족'이나 '유목 민족국가'와 같은 식으로 쓰일 때 발생한다. 저자는 역사적으로 '유목민 국가'를 만든 사례를 볼 때, 순수 유목민만으로 이뤄진 '국가'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 크든 작든 모두 하이브리드(hybrid) 상태인 다종족 국가(Multi Ethnic State)였다.

예를 들어보자. 이 책에서, 기원전 3세기에 세워져 유목 국가의 원형처럼 서술되는 흉노(匈奴)는 그 최대 구성 단위의 지휘자인 '만기'(萬騎)가 24명이나 있었다. 흉노국은 일종의 연합 권력 체제였던 셈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성(異姓)을 지닌 여러 왕과 그들의 휘하에 있던 여러 부족 집단이 뒤섞인 다원·다종족 혼성 국가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국내의 사전류를 찾아보면, '흉노'는 "기원전 4세기 말에서 기원후 1세기까지 몽골 고원과 동투르키스탄 일대를 지배해 번영했던 유목 기마 민족"이나 "중국의 이민족인 오호(五胡) 가운데 진(秦)나라·한(漢)나라 때에 몽골 고원에서 활약하던 기마 민족" 등으로 풀이돼 있다. 모두 '민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풀이는, 흉노를 다종족 국가로 보는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오류 투성이의 서술일 수밖에 없다.

'타자'의 눈, 왜곡된 시선을 고친다

 <최종병기 활> 중 한 장면.

<최종병기 활> 중 한 장면. ⓒ 다세포클럽·디씨지플러스


두 번째 질문으로 가보자. '만주족'을 들으면 어떤 말이 떠오르는가. '만주 벌판의 오랑캐'나 '야만적인 약탈자'?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당신이 스스로 자신의 의도하지 않은 '편견'을 자연스럽게 드러냄으로써 거꾸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가치가 높아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저자는 '만주(滿洲)'라는 말이 원래 중국 청왕조의 창시자인 누루하치가 '만주 구룬'이라는 이름을 채용한 데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누루하치가 요동 지방에서 만(萬)·몽(蒙)·한(漢)의 삼족이 혼합된 하이브리드 국가를 수립한 것은 16세기 말이었다. 이때 누루하치는 만츄리아(Manchuria·과거 중국 동북 지방을 가리키는 영어식 이름)·몽골리아·화북에 걸쳐 많은 사람이 믿고 있던 문수보살에서 유래한 이름을 따 새 국가의 이름으로 쓰고자 했다. '만주 구룬'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만주'는 원래 산스크리트의 '만주슈리'(Manjushuri·한역으로는 '문수사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불교의 대표 보살 중 하나인 '문수사리 보살'의 '문수'는 '만주'의 한자 음이다. '구룬'은 만주어로 '나라'를 뜻한다. 따라서 '만주 구룬'은 '문수의 나라'라는, 종교적으로 대단히 경건하고 간절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만주'나 '만주족'에 덧입혀진 부정적인 이미지가 순전히 편견과 오해, 왜곡된 선입관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이런 편견과 오해 등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저자가 '유목민'의 눈으로 기존의 세계사를 새롭게 보려고 노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목민'이라는 '타자'의 눈이 우리 자신의 왜곡된 시선을 거두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 자신의 말마따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나를 아는 것"(본문 414쪽)이 되고, "외국을 바라보는 것은 자기 나라의 모습을 돌이켜보는 일"(본문 414쪽)이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돌아간 김종훈, 그는 '사이비 유목민'이었을까

이 책을 읽다보니 김종훈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가 내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이중국적 논란 끝에 낙마한 그는 "미국은 나의 조국"과 같은 충성 맹세로 호된 비판을 받았다. 그런 그가 지난 3월 31일(현지 시간)에 실은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 "21세기에 가장 성공하는 국가와 경제는 국적과 관련된 오랜 편견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단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의 말이 곱게 들리지 않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그는 오래도록 미국에 거주하면서(정주하면서) 미국을 위한 '충성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가 뒤늦게 한국에 충성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미 정보기관에 소속돼 있는 자신의 직함을 유지한 채로 말이다. 나는 미국에서의 완벽한 '정주(定住)'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요컨대 그는 '사이비 유목민'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실상 내 눈에는 작금과 같은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에 이런 사이비 유목민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자신만의 안락한 '정주'를 위해 전 세계를 돌며 돈벌이에만 눈이 먼 사람들을 보면 특히 그렇다. 진정한 유목적 사고가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덧붙이는 글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스기야마 마사아키 씀 이경덕 옮김 | 시루 | 2013.03. | 2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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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 거대한 땅의 지배자, 유목민에 의해 세계사가 완성되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이경덕 옮김,
시루, 2013


#유목민 #스기야마 마사아키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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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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