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비아 지부 NGO5개월간 머물렀던 국제 NGO 잠비아 지부의 사무실과 공동 숙소가 있던 곳이다.
이근승
노트북, 카메라에다 밥통까지 팔아 돈을 마련하였다. 루사카로 떠나는 버스 차장에겐 버스비로 잠바를 벗어 주었다. 돌아가기 전 한 달간의 여행이 가능할 듯하다. 어차피 허허로운 심산이기에 발 가는 대로 닿을 여정. 그러다 보면 길은 열릴 테고, 시간과 함께 조금씩 하얀색 도화지에 색칠이 더해질 것이다.
리빙스턴으로 가는 밤 버스는 자정을 넘어 새벽 4시에 도착하였다. 여관이라도 찾으려면 날이 밝길 기다려야 할 터. 마중 나온 가족이 없거나 택시비가 여의치 않는 사람들은 버스 안에서 그대로 머물러 아침을 기다린다. 서늘한 기운에 자라목을 하고 구부린 등으로 새우잠을 자는 시커먼 사람들 너머로, 세계적인 관광지 리빙스턴의 아침이 오고 있다.
왜 도시 이름이 리빙스턴일까. 150여년 전 나일 강의 원류를 찾고자 잠베지 강을 거슬러 '모시 오아 툰야'(원주민어로 천둥소리를 내는 연기란 뜻으로 훗날 리빙스턴이 빅토리아 폭포로 이름을 지음)에 당도했던 그는 과연 누구인가.
도시 한가운데엔 과거 리빙스턴이 남긴 흔적의 잡동사니까지 긁어모은 리빙스턴 박물관이 있다. 혹자는 말한다. 노예의 참혹한 실상을 진정 아파하고 노예해방을 위해 실천하였던 위대한 선지자이며, 이 암흑의 땅에 문명의 씨앗을 뿌린 영웅이라고.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단지 교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던 서구 우월주의의 한계를 가진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또한 당시 흑인들에게 가해진 유럽인들의 잔인성에 놀란 나머지 기독교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노예해방이란 슬로건도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더 이상 노동 인력이 필요 없게 된 시대적 상황으로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리고 굳이 거창한 종교적 사명과 인류 평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처받은 자를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려는 마음은 시대를 관통하여 누구나 갖기 마련인 보편적인 미덕이라고 말한다면, 인간의 이성이 마비된 비정상적인 시대였음을 간과한 순진한 생각이던가?
탐험가이자 의사이며, 선교사이자 플랜테이션 농장의 지주였던 리빙스턴의 업적 중에서,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영국 왕립지리학협회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를 탐사한 자료들이 훗날 아프리카를 침략한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콩고 강을 건너 대서양까지 횡단한 후 저술한 '검은 대륙 횡단기'는 결국 천만 명의 콩고 원주민을 살해한 악명 높은 벨기에 레오폴드 2세를 불러들인 동인이 되고 말았다.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쩌면 한낮에 설핏 왔다 가버린 졸음처럼 하찮고 무의미한 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도시 이름을 헌납하고, 동상과 박물관을 지어 추앙하는 오늘날의 잠비아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