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 닉스 사임을 보도하는 미국 TVC-SPAN 갈무리
역사적으로 미국의 FBI나 CIA 등 정보기관 또한 많은 민간인을 사찰했다. 대표적으로 1971년 당시 몇몇 운동권 대학생들이 펜실베이니아주 '메디나'에 있는 정부 문서 보관 창고에 침입하여 '코인텔프로'(cointelpro)'라는 제목의 서류를 훔쳐내어 세상에 공개했다. 이 사건으로 정보기관이 많은 민간인들을 사찰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이 정보 서류에는 FBI 등 당시 정보기관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반국가 단체로 낙인찍힌 급진주의 그룹, 반전평화주의자, 대학교수, 예술인, 언론인, 학생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사찰하고 있었음이 그대로 기록돼 있었다. 이 사찰명단에는 국내에 잘 알려진 제인 폰더, 말론 브랜도 등 영화배우뿐만 아니라 존 레논 등의 가수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흑인 인권 단체의 대표자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국가 안보를 핑계로 발뺌하려는 정부의 은폐 기도가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결국 끈질긴 언론의 비판으로 3년 후에 미 의회 상하원 합동으로 '처치-파이크 특별조사위'가 구성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미국 언론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된 '정보자유법'(FOI, Freedom of Information)이라는 법률이 탄생했다. 이 사건이 오히려 미국 민주주의의 진보를 획기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은 발생 당시에는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행정부의 모든 의사결정 과정의 정점에 있었던 닉슨이 자신에게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발뺌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럴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으로 잡아뗀 것이다.
닉슨의 이러한 발뺌에는 그 당시 주류 언론들도 한몫 했다. 당시 워싱턴 정가에만 2천여 명이 넘는 기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닉슨의 이러한 거짓 발뺌을 보도하는 주류 언론들은 극히 드물었다. 닉슨은 더 나아가 당시 미국의 검찰 격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가 시작되자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CIA 등을 동원해 수사 방해와 '물타기' 시도 등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불법적인 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당시 알아주지 않던 지방지에 불과했던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두 젊은 기자는 이 사건 발생 후에 무려 201건에 달하는 기사를 보도했다. 결국 이들에 의해 닉슨의 거짓말이 탄로 났고 그가 권력 기관을 이용했다는 정황마저도 드러나, 그는 결국 사임했다. 당시 이 사건은 오늘날 높은 명성을 구가하는 <워싱턴포스트>를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꼬리자르기와 발뺌에 주력했던 닉슨,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