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을 겪고 있는 중이다

[시인 서석화의 음악 에세이] 조수미의 <나 가거든>

등록 2013.03.18 20:52수정 2013.03.18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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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부여해야 할 행간의 의미도 찾을 수 없는데 문득 떠오르는 단어에 집중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단어에 몇 시간 혹은 수일을 점령당할 때가 있다. 개연성이 없으므로 당혹스러운 첫 번째 감정이 찾아온다. 모든 정황상 맞지 않는 단어의 출현은 불편하지 않은가. 그러다가 어쩌면 오랫동안 내밀한 마음자리에 묵혀놓았던 것임을 발견한다.

'겪다'라는 단어에 수일을 매달려 있다. '겪다'는 문법적으로 타동사다. 타동사를 국어사전에서는 '행위의 대상인 객체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동사 혹은 동작의 대상인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동사'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붙들린다. 지금 내게 떠오른 저 타동사 앞에 들어갈 그 무엇을 나는 뭐라고 적을까? 뭐라고 그것을 불러내야 부지불식간에 떠올라 나를 죄여오는 '겪다'를 매끈한 문장으로 성립시킬 수 있을까? '겪다'의 뜻은 '당하여 치르다' 혹은 '경험하다'이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무엇을 당하고 치렀으며 또 무엇을 경험했다고 자신 있게 스펙으로 내밀 수 있을까?

단어들이 줄지어 불려나오고 있다. 인생을 겪다, 사랑을 겪다, 불면을 겪다, 아픔을 겪다, 나이를 겪다, 계절을 겪다, 이별을 겪다... 종결어미가 '겪다'여서일까?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렸던 애환과 시련, 즉 따스함보다는 한기가 느껴지는 온갖 목적어가 툭툭 내 앞으로 와 선다. 모든 것이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이 된다.

'겪다'를 '겪었다'로 과거형으로 바꿔본다. 지나왔다는 뜻이 추가된 탓일까? 불편했으나 팽팽했던 마음이 헐거워지면서 온몸에 살아온 세월만큼 주름이 진다. 주름 사이 파진 골에 수많은 내 얼굴이 드러난다.

봄날 아카시아 꽃잎처럼 부드럽게 흩날렸던 웃음과 여름 장마처럼 온 시간이 우수로 찼던 고즈넉했던 시간, 늦가을의 비애를 적시고도 남았을 눈물범벅의 순간과 체온의 급강하로 등을 펼 수 없었던 긴 겨울의 움츠림. 지나왔다고, 그래서 당연히 잊었다고 생각해 온 내 역사가 펴지지 않는 주름이 되어 다시 나를 드리운다. 이미 완결된 어떤 순간과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용기와 여유는 아직 생기지 않는다. 나는 아직 '겪고' 있는 중인 것이다.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 쉬듯 물어 볼까요 나는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야 나 알 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내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흩어진 노을처럼 내 아픈 기억도 바래거든
그땐 웃어볼까요 이 마음 그리운 옛 일로
저기 홀로 선 별 하나 나의 외로움을 아는 건지
차마 날 두고는 떠나지 못해 밤 새 그 자리에만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야 나 알 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내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주길

부디 먼 훗날 나 가고 슬퍼하는 이 내 슬픔 속에도 행복했다 믿게 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긴 하지만 내가 부를 때나 남이 부르는 걸 들을 때 예외 없이 가슴이 저며와 잠시 의식의 정전화를 가져오는 노래가 바로 조수미의 <나 가거든>이다.

<나 가거든>은 대원군의 며느리이자 조선 왕조 가장 비운의 왕비인 민비의 삶을 드라마화한 극에 OST로 삽입된 노래다. 처연함과 비장함이 공존하던 민비 역할의 탤런트 이미연의 표정연기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 라고 포효하듯 일본군을 향해 마지막 말을 내뱉은 민비의 장엄함. 그러나 그때 배경을 받치며 흘러나왔던 노래는 굵고 당찬 목소리가 아니라 천상의 소리라고 하는 맑고 높은 조수미의 음성이었다. 무장돼 있는 독기나 항변의 전투성 가사도 아니었다. 핏빛처럼 장렬한 색조의 호흡도 보이지 않았다. 애련하다 못해 새벽에 하는 혼잣말처럼 외로움마저 느끼게 하는 음색과 가사였다.
 
그런데... 이 노래는 치열하다. 한 생을 '겪은'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도 수동적으로 '겪음'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온 가슴으로 맞이하고 핏줄 한 조각 뼈 한 마디 모두 일으켜 대항하며 '겪어온' 사람이 그려진다. 그래서 남은 무엇이 없는, 덜 했다고 자책할 일이 없는 사람만이 이런 곡조로 이런 내용으로 마지막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두려움과 절망조차 기꺼이 등에 지고 힘이 다해 쓰러질 때까지 걸어본 사람만이 이제 마지막으로 치러내야 할 죽음 앞에서도 담담할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

후회와 미련이 없는 삶은 마지막을 행복이란 상찬을 받게 해 준다. "슬퍼도 살아야 하"는 걸 아는 사람은 "슬픔까지도 사랑"했던 자신의 시간을 세상에 남긴다. 때문에 말의 힘이나 내용의 강함을 받쳐줄 별다른 데코레이션이 필요가 없다. 조수미의 <나 가거든>이 성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 가거든! 나는 뭐라고 말하고 싶을까? 누구에게 이 말을 하고 갈까? 지금까지 겪어왔고 앞으로도 겪어야 할 모든 일에 치열하게 맞설 일이 아직은 두렵다.
#서석화 #조수미 #나 가거든 #음악 에세이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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