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2011년 6월 12일로 158일째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서 고공농성 중인 가운데,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13시간 가량 크레인 아래에서 머문 뒤 떠나면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 가운데 모자를 쓰고 손을 흔드는 이가 김세균 서울대 교수.
윤성효
309일 동안 스스로를 유폐했던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오고 나서도 입원 치료를 두달 이상 받아야 했고, 이어지던 검찰소환, 재판, 그리고 보고 싶었던 분들을 만나러 다녔던 1년여의 시간들.그리고 한진중공업의 노사합의 위반으로 또다시 노동자의 죽음.
그 원한 맺힌 노동자의 장례를 치르는 데만 66일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저에게 다시 발부된 체포영장과 경찰조사, 보강조사, 구속영장 청구, 영장실질 심사, 기각, 다시 보강조사, 구속영장재청구, 다시 기각. 이후로도 저의 신변은 제 소관이 아닌 채로 안개 속에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김세균 교수님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에야 알게 됐습니다. 85크레인에 있던 저를 살리겠다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몇 번을 달려오셨던 김세균 교수님의 그 순정과 뜨거운 마음에 비하면 저의 게으름이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제가 크레인에 오른지 158일 만에 처음 희망버스가 왔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그저 외롭고 쓸쓸하고 막막했습니다. 그 85크레인은 저의 20년지기 친구이자 동지였던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을 매달려있다 목숨을 끊은 곳이고, 그의 죽음에 죄책감을 견디지 못했던 곽재규라는 순하디 순한 노동자가 47년 한많은 생애를 던졌던 4도크가 바로 앞에 보이는 곳입니다.
김주익 지회장의 시신이 누워있던 85크레인 위엔 삶의 기운보단 죽음의 기운이 훨씬 강했고, 땅보다는 하늘이 훨씬 가까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뼘 한뼘 하늘에 더 가까워질 무렵 희망버스가 왔습니다. 그 버스에 김세균 교수님이 타셨다는 건 뒤늦게야 들었고 희망버스가 다녀가면서야 멈춰선 채 녹슬어가던 크레인에 비로소 작은 희망의 싹이 자라는 게 보였습니다.
주말의 휴식을 고스란히 반납한 채 왕복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그것도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비용까지 감당해가며 화장실도 마땅히 없는 길거리에서 절망버스라는 비난까지 감수해가며 연대했던 그분들이야말로 저는 이 사회 진정한 지성인들이라고 믿습니다.
탱크의 편이 아니라, 탱크 앞에 맨몸으로 서있는 자와 연대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탱크의 힘이 아니라 지성과 상식의 힘으로 굴러가게 될 것입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통근버스를 타고 똑같은 길을 따라 똑같은 공장에 출근해서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일을 하다 다시 똑같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십년 넘게 거듭하는 노동자들은 사실 세상이 누구의 편인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미처 깨달을 여지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다 이름과 사번이 찍힌 해고통지서를 받아드는 순간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순진하게 믿게 되지요. 내가 억울하니 내 얘기를 누군가는 들어줄 것이다. 내가 당한 일이 말도 안 되니 시간이 지나면 바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언론도, 정치도, 법도, 심지어는 정부내 유일하게 노동자들을 위한 부처인 노동부마저 자신들의 편이 아님을 알게 되면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포기하거나 계속 싸우거나.
저는 후자의 경우였고 그렇게 28년이 흘렀네요. 해고된 노동자들이 가장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건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집에서 밥먹고 집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씻고 출근하는 일. 그러나 그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가장 멀고 험난한 게 현재 해고노동자들의 삶입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세상 아무도 내편이 없다는 절망감. 세상에 그보다 큰 절망이 또 있을까요.
서울대, 누구의 대학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