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교회인 덕천교회를 방문한 조윤구 선생 내외불편한 몸을 이끌고 농촌에서 목회하는 우리 교회를 방문하고 예배를 드린 뒤 앞 마당 잔디밭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명재
조윤구 선생의 선친인 독립운동가 유정 조동호 선생에 대해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조동호 선생의 호는 유정(榴亭)입니다. 1892년 충복 옥천에서 출생해서 1954년 돌아가셨습니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 동인, 한중호조사와 한국노병회 창립 등 중국에서의 항일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23년 귀국해서 조선공산당에 조완구 신채호 김두봉 등과 함께 가입, 출판부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유정은 또 독립운동에 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당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몽양 여운형 선생을 사장으로 모시고 항일 논설을 집필하며 언론으로도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유정은 몽양의 독립 노선에 동의하고 그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일제 말 조선건국동맹의 군사위원회에서 일하다가 해방 뒤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부장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완전 독립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54년 9월 11일 고향인 옥천군 청산면에서 60여 성상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이런 유정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여운형의 사회주의 계열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독립운동은 몇 개의 노선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본다면 민족주의 계열, 사회주의 계열, 무정부주의 계열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세 개의 흐름을 필요에 따라 넘나들며 항일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유정 조동호 선생을 굳이 이 세 개 중 하나에 귀속시킨다면 여운형 선생과 함께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 노선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랜 시간 유정 선생에게 굴레로 작용했습니다. 사회주의 심지어는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그는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고친 분이 유정의 장남 조윤구 선생입니다. 그는 중증 장애인의 몸으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보훈청, 국회의사당 등 관계되는 기관이라면 찾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수용될 때까지 수십 번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갔습니다. 독립운동 관련 서적이란 서적은 거의 빼지 않고 독파해 그 분야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갖고 있어서 대화하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근현대사를 바로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극한 정성은 사람뿐만 아니라 하늘도 감동시켜 마침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3월, 유정 선생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받고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모셔졌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조윤구 선생의 불굴의 의지가 큰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윤구 선생의 성실한 자세와 숭고한 뜻이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를 역사 위에 동승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조 선생은 소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향 옥천에 아버지를 추모하는 공원을 만드는 것이 그것입니다. 땅을 사서 나무를 심고 돌을 박은 가운데 아담한 공원을 조성해서 가운데 선친 유정 조동호 선생의 늠름한 동상을 세우는 게 그의 마지막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시세에 훨씬 밑돌게 집을 파는 등 재정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라는 딱지는 고향 인심에도 영향을 미쳐 일부 반대 여론으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는 마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