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주가 끝난 후에 반주자들과 함께. 윗줄 좌측부터 장석원씨(드럼), 고명원씨(기타), 이지은씨(건반), 연영석씨, 박우진씨(베이스).
연정
연영석씨는 이번 콘서트에서 민중음악을 하는 백자씨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는 깊이 있고 자신의 진심을 담아 묵묵히 음악을 해오는 백자씨의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했다.
"(백자는) 사람들에게 친화감을 가지고 있고, 여백이 있어요. 소위 민중가요 판 내에서 싱어송 라이터로서 자기 음악적 길을 가는 뮤지션들이 많지 않거든요. 그런 사람의 하나죠. 자기 음악 색깔을 갖고 현장에 대해 자기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백자는 클럽에서도 열심히 하고 있죠.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 자기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가요." 게스트로는 '회기동 단편선'이 무대에 오른다. 연영석씨는 '회기동 단편선'이 전통적인 노동가요나 민중가요의 맥과 다르면서, 보통의 인디뮤지션들과도 다른 결을 갖고 있다고 본다. 힘들 수도 있는데, 음악과 사회운동에서 자기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인단다. 연영석씨는 이번 콘서트가 음악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결합하고, 소통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난 아직 젊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진화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고 싶은 욕망도 있어요. 백자도 마찬가지고, 단편선은 더 무한한 가능성이 있죠. 호철이형(김호철)이 만든 <단결투쟁가> 같은 투쟁가들은 노동자와 자본이 있는 한 영원히 필요할 겁니다. 우리는 그 방식이 아니더라도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그 얘기를 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거고요.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쉽진 않을 거에요."그는 '동행 콘서트' 무대에 오르는 뮤지션들에게 '어떤 공연 하나 초대받았다, 나한테 어떤 공연 생겼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고 무엇을 새롭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면 좋겠다는 제안도 한다. 그것은 연영석씨가 개인적으로 공연을 흔쾌히 할 수 없는 에너지 상태임에도 이번 콘서트에 동참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동지들, 우리 음악에 연대해주면 안될까그는 고공농성을 하는 노동자들도 누군가의 가족이거나 연인일 것이며, 올라가기 전에는 그 사람들에게도 밥을 먹고 술도 먹고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삶이 있었을 거라고 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란다.
"나라는 사람이 현장에서 노래를 부를 때, 그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몇몇 노래가 다가 아니에요. 나는 슬프기고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어떨 땐 기운이 넘치기도 하고. 애하고 지지고 볶이고, 마누라하고 지지고 볶기도 하고, 돈 때문에 안절부절하기도 하고 그러고 산단 말입니다.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자기 길을 만들어 가는가 하면, 포기하고 싶다가도 다시 오기가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아집을 부리기도 하면서 버텨가는 것처럼. 우리 음악도 그렇게 버텨가는 거지. 내 음악도 그렇게 버텨가는 거지. 그런 걸 살짝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연영석씨는 비록 단독 콘서트가 아니라 충분치는 않겠지만, 집회장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시간이 되면 와서 '쟤가 저런 음악을 하는구나', '쟤는 저런 걸 좋아하는구나', '저것도 괜찮네. 저건 별로야' 하고 가면 좋겠단다. 물론, 이 역시도 바쁘면 오지 않아도 된단다.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약한 모습이나 비굴한 모습도 소중하다. 내 동지가 그런 모습을 보여줬을 때, "쟤는 저런 놈"인 게 아니라 "너 좀 쉬어. 내가 할게", "나 힘들어. 니가 좀 해"라며 균형을 맞추면 좋겠단다. 그래야 사람이 숨을 쉬고 살지 않겠냐고.
"우리는 운동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 음악도 하는 사람이잖아요. 현장에서 부르는 노래는 딱 한정돼 있잖아. 세 곡, 길어봐야 네 곡. 짧으면 두 곡. 그것도 아는 노래. 추우면 내 노래 중에서 그나마 신나는 거 몇 곡 하고 마는 건데. 우리 동지들이 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그렇게만 보는 거잖아. 때로는 '저 사람들이 내 음악에 대해서 아나?'라는 의혹이 생길 때가 있어. 내 음악에 대해 궁금해라도 하나? 어떨 때는 그런 게 많이 섭섭할 때도 있지. 우리가 연대하는 그 동지들이 우리 음악에 연대해주면 안될까 하는 아쉬움이 솔직히 있지. 그렇지만…. 그래도 늘 같이 하지 못하니까 미안하지.""모으고 쌓아두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그는 정작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공연 소식을 알리지 못한다. 페이스북 친구가 4000명이 넘지만, 여태 홍보 글 한 번 올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뭐 한다 알리는 거 그런 걸 못해.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이거야. 오려면 오고, 말라면 마라 이거야. 머릿속에는 그런 게 필요하다는 걸 알아. 모르면 바보지. 때로는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도 알지. 알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거는 어쩔 수 없지. 난 어렸을 때부터 뭘 모으고 쌓아두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 비우는 스타일이지. 학교 다닐 때는 가방도 안 들고 다녔고, 대학교 다닐 때 미대 나왔지만 공구도 없었어. 그게 내 체질인 거지."결혼 전에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12만 원 짜리 옥탑방에 살 때는 이불 대신 옷을 덮고 자기도 했다. 밴드 '천지인'에서 준 이불을 가져와 옥상에서 발로 밟아 빠는데, 빨아도 빨아도 땟국물이 계속 나와 결국 포기하고 그냥 말려서 덮고 잔 일도 있다. 집 안에 짐이라고는 박스에 올려놓고 쓰는 컴퓨터 한 대가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고 있는 지금, 사회생활을 하고 살아가기 위해 기획을 잘하고 자리도 만들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게 머리로 생각은 하는데, 행동이 잘 안된단다. 그렇게 하는 게 어색하고, 자신과 잘 안 어울리는 것만 같다. 취재하면서 자료로 참고하려고 했던 그의 개인 누리집 '게으른 피'가 없어진 것을 알고 적잖이 당황했다. 후배가 만들어준 누리집에 그가 업데이트를 하며 운영해오다가 몇 년 전 귀찮고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해 없애버렸단다. 자료 보존 기간 통지를 받았지만, 백업을 할 줄도 모르고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해 그냥 뒀더니 자동 폐쇄 됐다고.
그는 이런 인터뷰도 어색하다고 했다. 쑥스럽기도 하지만, 거리에서 고공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미안해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가 이번 인터뷰에 응하는 건 인터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간 내서 찾아온 나에 대한 배려 때문임을 안다. 그런 그의 배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가능한 '소박한' 인터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영석. 그는 참 미안한 게 많은 사람이다. 개인적인 힘듦 때문에 '셀프 안식년'을 받아 시골에 내려가서 쉬었던 2009년에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지 못한 게 지금도 미안함으로 남아있다고. 그가 처음으로 '운동판을 쌩까고' 고향에 내려가서 편안함과 미안한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만들었던 노래가 이번 공연에서 부를 <하루>(옛 <빨래>)라는 노래다.
'어거지'로 사는 게 싫은 문화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