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기어코 살아났다.
이매진
여성가족부가 펴낸 '2010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성폭력 발생빈도는 32.5명으로, 가장 수치가 낮은 일본(1.2명)과는 30배 넘게 차이가 났고, 미국(28.6명)과 영국(24.1명), 프랑스(16.6명)보다도 높았다. 이 수치는 해마다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 수치는 당연히 신고된 건수만을 기준으로 한다. 피해자가 극심한 수치심에 시달리는 성폭력의 특성상 신고되지 않은 수많은 범죄들이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성폭력은 끔찍한 비율로 발생하는 일상적 범죄다.
성폭력은 사회의 남성성을 강화하고 피해자뿐만 아니라 여성의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몇몇 사람들은 '여성들이 스스로 조심한다면, 남성을 자극하지 않고 여성성을 절제하고 조신한다면 성폭력을 피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되레 '네가 그럴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추궁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추론들은 명백한 허위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해 가하는 또 다른 폭력이다. 이러한 사회의 부당한 시선 속에 성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선뜻 고발하지 못한다. 가해자의 복수, 사람들의 차가운 편견, 가십성 기삿거리로 사건을 다루는 사회의 시선 등 감당해야 할 두려움과 수치심은 성폭력에 못지않은 고통인 까닭이다.
저자는 '은수연'이라는 필명을 선택했다. 형제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는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은수연'이란 이름은 합당하다. 그녀는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기어코 살아났으니까. 그녀는 아빠와도 맞서 싸워야 했지만, 세상의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70~80%가 정신 질환에 걸린다고 떠드는 정신과 의사의 말도 상당히 불쾌하다. 소설·영화 속에 등장하는 성폭력을 당한 여주인공들을 볼 때도 심기가 불편하다. 그 여성들은 엽기적이고, 침울하고, 어둡고, 우울하게 살면서 연쇄 살인을 하기도 하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다 극의 말미에 가서는 엄청난 비밀이 한 겹 한 겹 벗겨지고 '그 여자는 어릴 적에 성폭력을 당했다'라는 이야기로 여주인공의 문제 행동을 이해시킨다."(본문 19~20쪽)용기를 내어 치유의 길로 떠나다저자는 아빠의 폭력에서 벗어난 다음, 비로소 자신이 자유로움을 좋아하고,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처음으로 자신이 듣고 싶은 강의를 신청하고, 처음으로 혼자 미용실도 갔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며, 치유를 위한 첫걸음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빠를 벗어나면 다 해결될 것 같았지만, 그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았다.
"동화 속에서 힘들게 살던 여주인공은 고통에서 벗어나면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더래요'로 끝이지만, 나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 밝은 겉모습이 다 덮을 수 없는 것들이 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기억. 그건 무서운 거다. 무엇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고, 없앨 수 없다. 보상받을 수는 더더욱 없다. 지금 내가 자유롭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몸, 내 마음, 내 영혼, 내 시간에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엷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본문 56~57쪽)그녀는 어느 순간 괜찮은 척하기를 멈춘다. 그리고 어느 때고 슬픔이 벅차오르면 울었다. 슬퍼하는 대로 자신을 내버려뒀다. 그로 인해 남자친구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떠났지만,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깊고 깊은 상처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갔다. 무엇보다 시간을 견뎌야 가능한 일이었다.
"새 살이 돋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본문 76쪽)그리고 그녀는 상처에 맞서 싸운다. 상처를 노출하고, 표출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빠를 직면하고 용서하기로 결정한다. 감옥에서 7년을 보내고 나온 아빠는 여전히 지독한 이기심을 가졌고, 가족들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고, 여전히 그는 목사였다. 반면 저자는 혼자였고 가난했고 여전히 눈물 많은 가녀린 존재였지만, 아빠를 용서하고 자유로워지기를 선택한다. 데이비드 그리피스는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저자는 살아남기 위해 지금껏 버텼다면, 앞으로는 용기를 내 자신의 삶을 살아내겠다는 당찬 꿈을 향해 길을 나선다.
"수연, 이제 '용기'를 내기 위해 떠난다."(본문 227쪽)'올해의 여성운동상' 수상자 은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