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 겉그림
마티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를 쓴 프랑스 태생의 정치학자 니콜라 귀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무일푼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산업체를 건설하면서 '도적남작'이라는 악명을 얻은 카네기나 록펠러가, 자선재단을 설립해 대학과 병원, 복지시설 등에 후원하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 재단의 일은 순수하게 '나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저자는 그들이 '자선'을 하나의 사업처럼 다루면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거나, 자신들을 사회적 약자를 돕는 정의의 사도와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로 치장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자본'을 창출해내는 데 엄청난 공력을 기울였다고 보고 있다. 이 상징자본이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쓰이는 것임은 물론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대상인 포드 재단이나 소로스 재단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상술하고 있는 조지 소로스의 사례는 시사적인 데가 많다. 저자에 따르면, 조지 소로스는 자선사업마저도 그가 거액의 돈을 벌어들이는 데 썼던, 기업의 인수합병 모델 형태를 활용하여 진행한다.
'우선 냉전기에 설립되어 지난 20여 년간 동구권에 수많은 지식을 배출하였으나 재정적 난관에 부딪힌 작은 재단을-다른 용어로 표현하면, 높은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시장에 의해 저평가된 기업-인수한 뒤 경영에 참여한다. 이후 점차 통제권을 늘려나가다 소로스는 이 재단을 열린사회네트워크(그가 세운 '소로스 재단'과 '열린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하는 내부 네트워크-필자 주)에 합병한다. 이 과정은 금융계 출신 오퍼레이터들의 주도 아래 자선사업이 상징자본의 시장으로 침투하는 방식이다.' (116쪽)
이밖에도 저자는 피지배층에 속해 있던 총명한 인재가 소로스가 세운 자선 재단의 전략 안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핵심적인 추동 세력으로 변모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고도의 작업은 소로스가 헝가리에 세운 중부유럽대학을 중심으로 은밀하면서도 공공연하게 펼쳐진다.
애초 이 대학의 설립 목표는 실무적인 경영 관리 능력과 정치적인 실용주의로 무장한 직업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경제학과 신자유주의 담론이 완전히 지배하는 교육과정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후 이 대학은 전통적인 인문학에 바탕을 둔 교양 교육 과정을 도입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시장 자유주의의 본거지로 비춰지는 것을 막는 '치장' 작업에도 커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저자는 중부유럽대학이 탈국가적이고 '범세계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교육기관으로 자처하면서 모든 국가 엘리트들이 신자유주의로 전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한편 세계적인 통치 계급을 육성하기 위해 주도면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돈줄'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금융세계화를 해치지 않고 세계적인 거버넌스를 보장해주는 통치를 위한 지식의 생산 공간으로 이 대학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부설 연구소인 정책연구센터는 NGO 영역까지 확대되어 있다. 저자는 이 연구소가 'NGO 관계자와 대학 간의 대화' 채널을 구축함으로써 표준화한 교육 과정 아래 미래의 행정 관료 교육과 시민 단체 활동가 육성 프로그램을 수렴하는 시도를 하는 걸 주요 목표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고 말한다. 법학과, 경제학과, 정치학과 및 경영대학원에서 제공하는 공공행정 석사과정이 그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다.
기업들의 노력이 순수해 보이지 않는 이유소로스가 이와 같은 작업을 벌이는 이유를 이제 눈치챌 수 있겠는가. 저자는 소로스의 (재단이나 대학 등을 통한) 자선 프로젝트가 이해 관계와 정치적인 신념이 다른 행위자들을 유인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세계화 리더 양성이라는 '공통 과목'을 설정하여 금융 기관에 대한 시민사회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모습은,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에서 자선사업가들이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투자하여 계급 대결을 완화하고 자본에 유리한 체제를 구축한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이 과정을 통해서 노동을 향한 자본의 지배와 착취 구조는 자연스럽게 은폐되었다. 금융자본의 지배 구조를 영속화하는 데 기여하는 조지 소로스의 '음흉한 속셈'을 냉철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리 경영'이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같은 담론이 사회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시대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대기업에서는 직원들을 동원해 꾸준히 봉사 활동을 펼치기도 하고, 대학이나 연구 기관 같은 곳에 거액의 후원금을 대기도 한다. '산학 연계'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대학과 기업이 갈수록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지는 이미 오래다.
문제는 그와 같은 그들의 노력이 절대로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업은 자선이나 봉사를 노골적으로 자사 홍보 수단의 하나로 활용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경제 효과를 가져오는 상징자본의 획득 수단으로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으리으리한 대기업 이름과 로고가 따라 붙는 대학 건물(이름)이나 기숙사가 씁쓸하게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치 권력뿐만 아니라 경제 권력(자본)으로부터 학교가 독립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우울한 질문이 머릿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는다.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 - 세계 금융을 지배하는 수퍼리치들의 두 얼굴
니콜라 귀요 지음, 김태수 옮김,
마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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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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