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천시의 <운주산>
산도깨비산악회
운주산 - 김두권 운주산어찌하여 요즘 자꾸 내 눈앞에 떠오른 것일까잊지 못할 고향의 산아가만히 그 이름만 외워도수려한 그 모습 안겨오네
향수에 젖는내 고향의 못 잊을 산아얼마니 많은 해와 달이 지나갔는가내 고향에 돌아가면맨 먼저 운주에 오른다고 다짐하던청춘시절 그때로부터운주는 사철이 아름답지만여름의 운주가 제일이야어릴 적 여름방학이 되면너의 푸른 자락에 해종일 뒹굴었더라철이랑 순이랑 어깨동무들과 함께우거진 잡목 밑졸졸 흘러내리는 계류를 따라참나물을 캐던 일지금도 이 눈에 선히 떠오르네참나물 그 향기 이제도바람결 따라 풍겨 오는 듯해 솟는 운주해 지는 운주가없이 푸른 너의 하늘에 떠가는흰 구름에 꿈을 실어 보내며내 꿈을 키우던 곳운주는 첫 발자국이 찍힌 산내가 찾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어머니 숨결이 어려 있는 내 고향요즘 꿈속에 자꾸 찾아오네고향의 운주정다운 운주고향 갈 차비를 다그치란 말인가아, 운주가 나를 부른다운주가 나를 부른다 (1991년)어린 시절 고향의 뒷산저는 대한해협을 건너 도쿄 한복판에서 어린 시절 고향의 산을 그리는 선생님의 망향 사연을 매우 느꺼운 마음으로 읽은 뒤 인터넷에서 '운주산'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과 영천시 자양면, 임고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과 영천시 자양면, 임고면의 경계 상에 있다. 해발 806.2m로, 포항 지역을 관통하는 낙동정맥의 한 줄기를 이룬다. 멀리서 보면 구름을 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보여 '운주산(雲柱山)'이라고 하였다. 산세가 험난해 방어지로 적합하여 임진왜란 때 백암 김륵의 부대가 성을 쌓고 진터를 설치하여 왜적과 항전을 벌였으며, 1910년대 산 아래에 있던 안국사가 포항 지역 의병부대인 산남의진(山南義陳)의 근거지로 알려져 일제에 의해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산 중턱에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전쟁 때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된 동굴이 있다. [두산백과]재일 종소리 회원들이 펴낸 <치마저고리>라는 시집의 날개에서 김두권 선생의 약력도 보았습니다. 1925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교토 인문학원 수학, 교토조선학교 교원, 교무주임, 문예동 중앙사무국장, 부위원장 역임… 등
선생님께서 팔십 평생 그리면서도 끝내 찾아보지 못하는 고향은 사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닙니다. 도쿄 나리타나 하네다 공항에서 두 시간이면 김해국제공항에 닿을 수 있고, 거기서 승용차를 타면 두 시간 내에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곧 이른 아침 도쿄에서 출발하면 점심은 운주산 아랫마을에서 고향의 산 산채비빔밥을 드시고, 저녁은 도쿄 신주쿠 선생 댁에서 드실 수 있도록 세상은 참으로 좁아졌습니다.
그런데도 선생의 고향 운주산은 선생님께는 모스크바보다도, 남극 킹 조지 섬보다도 더 먼 곳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 10여 년간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동남아 등 여러 곳을 근현대사 자료 수집 목적으로, 독립전사들의 유적지를 답사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조국 한반도에만 있을 줄 알았던 38선, 휴전선의 철조망이 곳곳에 쳐있음을 알고 매우 가슴 아팠습니다.
내 조국 백두산도 가까운 길을 두고서 중국을 거쳐 멀리 찾기도 하였습니다. 다행히 저는 작가의 신분으로 2005년 북한을 방문하여 묘향산, 백두산을 찾아가 봤지만 아직도 일천만 이산가족 가운데는 세계 방방곡곡은 다 둘러보아도 당신 고향 뒷산을 찾지 가지 못한 아픈 실향민이 부지기 수로 끝내 눈을 감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수리스크 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