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주가리'로 불렸던 시절의 나
이규정
누구도 날 '주걱턱'이라 부를 수 없다수술실에 들어가 곁눈질을 하니 바닥에 고여 있는 피도 보였고 약냄새, 피비린내가 났다. 무시무시한 장비들도 보였다. 전날 수술동의서에 사인할 때가 생각났다. '턱 좀 깎다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 곧 침대가 멈췄다. 마스크를 낀 의사가 눈을 껌뻑이며 "금방 끝나요"라고 했다. 한 간호사가 "전신마취 들어가요"라고 하며 내 얼굴에 호흡기를 들이댔다. 호흡기에 대고 숨을 두 번 들이 쉬었다. 스르륵 눈이 감겼고 그 뒤로 기억이 없다.
하악수술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큰 수술이다. 내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의사는 내 어금니 뒷부분을 절개해 아랫턱을 노출시켰다. 그리고 그는 내 턱뼈를 2cm 가량 부쉈다. 갈았는지 망치로 부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필요한 만큼 자른 뒤에는 관절에 끼우기 위해 다듬었을 것이다. 수술 중에는 피가 많이 나와 수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세상 모르고 마취약에 취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을 뜨니 의사와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의사의 첫마디는 "말하지 마세요"였다. 그의 말에 온몸의 감각이 확 살아났다. 내 입안은 피와 고름으로 가득했다. 간호사는 석션 기계(suction: 피나 고름을 빨아들이는 의료용 기구)를 이용해 수시로 내 입안에 고인 피와 고름을 빼야했다. 내 입 안에는 호흡기와 석션기계가 들어가 있었다. 턱뼈 끝이 욱신거리기 시작해 움직일 엄두도 못냈다. 나는 내 얼굴을 보고 싶어 손가락으로 '거울'이라고 썼다. 엄마가 거울을 가져다 줬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영락없는 '짱구'였다. 양 볼은 바람을 잔뜩 넣은 듯 부어있었다. 갸름했던 내 얼굴이 처참히 망가져있었다. 의사는 "입 안쪽 꿰맨 자리가 아물 때까지는 벌리면 안 된다"고 했다. 밥은 어떻게 먹나? 의사 표현은 어떻게 하나? 입안에는 피와 고름 그리고 침까지 착착 쌓였다.
그러나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거울 속 내 윗니가 아랫니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아무도 나를 '주걱턱'이나 '턱주가리'로 부를 수 없었다. 왜냐면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이제 '주걱턱'은 누구도 공감하지 않을 별명이 됐다. 볼은 풍선처럼 부풀어있고 두 눈은 퀭해있었지만 내 치열은 완벽하게 가지런했다. 치열을 확인한 뒤 나는 간신히 눈으로 웃었다. 의사가 "수술은 잘됐습니다"라며 웃었다.
'하악수술'하고 배고파서 하악하악그 뒤로 일주일간의 입원생활이 시작됐다. 6인실 병실에는 모두 턱 수술한 청춘남녀들 뿐이었다. 이들 모두 한 때는 '주걱턱' 또는 '턱주가리'로 불렸으리라.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그들과 가끔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동지적 눈길'을 주고 받았다. 우리가 주고 받을 수 있는 건 눈길이 전부였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내 입은 움직일 수 없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스케치북과 마커를 사다줬다. 나는 글로 의사표현을 했다.
말 못하는 고통보다 먹지 못하는 고통이 훨씬 컸다. 수술 뒤 먹은 첫 만찬을 잊을 수 없다. 점심 시간 간호사가 가져온 쟁반 위에는 죽이 담긴 사발 두 개와 바나나만한 크기의 주사기와 지름 1cm 굵기의 호스가 놓여있었다. 간호사는 주사기로 사발에 담긴 죽을 쭉 빨아들이더니 주입구를 호스와 연결했다. 그녀는 호스를 내 어금니 안쪽으로 넣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주사기를 눌렀다. 달콤한 호박죽이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넘어왔다.
호스로 죽을 먹을 때는 주사기 누르는 압력과 삼키는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처음에는 그게 어려워 사레 들리기 일쑤였다. 이를 꽉 다문 채 기침을 하면 턱이 움직여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말할 수 없이 배가 고파 나는 연신 기침을 하면서 죽과 주스를 들이켰다. 그러다보니 화장실만 엄청나게 다녀왔다.
하지만 이 고통은 참을 만했다. 사실 내가 큰 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병실에는 나보다 훨씬 위급한 환자들이 많았다. 턱 좀 깎고 엄살 떠는 게 남우세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주걱턱'은 그 무엇보다 '정상턱'을 원했다. 나는 내 '주걱턱'에 엄청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