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보호사와 함께요양병원 입원 100일째 되던 날(2010년 3월 11일)의 노친 모습
지요하
서울대 의대를 나오고 서울대학병원에서 오래 근무를 하다가 시골로 내려와 개업을 한 원장의 실력을 그 친구는 내게 열심히 설파했다. 자궁적출 정도는 굳이 큰 병원으로 가지 않아도 되고, 원장은 그런 수술을 이미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다는 말도 했다. 결국 나는 그 친구의 권유를 따랐다.
고장의 외과의원에서 자궁적출 수술을 받은 모친의 참혹한 병고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는데, 모친의 자궁 안에 끼워진 소변 줄로 소변이 나오지를 않았다. 다음날 원장은 나를 불러 재수술 계획을 말하며 동의를 구했다. 나는 수술이 잘못 되었음을 직감하고 지금에라도 큰 병원으로 가는 게 옳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했지만 막상은 실행을 못하고 원장의 권유를 따랐다.
그날 밤 다른 지역에서 개업을 하고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와 비뇨기과 전문의가 왔다. 외과의원 원장의 친구들이라고 했다. 세 명의 의사가 한참동안 X레이 사진들을 보며 의논을 나누더니 11시쯤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장장 5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수술 도중에 원장이 불러 나는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서 원장이 보여주는 뭔가를 보며 설명도 들었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 후 모친은 그 외과의원에서 무려 3개월 동안이나 병상 생활을 했다. 입원비와 치료비는 들지 않았지만, 특별한 고가의 약과 혈액 값 등은 내가 부담을 해야 했다. 환자는 환자대로 긴 고생을 하고, 나는 나대로 비용 지출이 커서 애초 큰 병원으로 가지 않은 후회가 너무도 컸다. 그래도 나는 원장에게 한 번도 불만을 내색하지 않았다. 치료에 최선을 다해주기만을 바랐고, 모친이 퇴원하던 날은 원장을 바닷가 생선회집으로 모셔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 후 모친의 방광에 문제가 생겼다. 배뇨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심한 통증을 겪기도 했다. 그리하여 1992년 가을 천안 순천향대 병원으로 모친을 모시고 갔다. 진단 결과 방광 안에 돌이 있어서, 그 결석을 빼내는 수술을 해야 했다. 그 결석은 알밤보다도 컸는데, 방광의 결석이 그렇게 커지도록 모친은 고통을 감내하며 사신 것이었다.
나는 모친 방광의 그 결석은 1988년의 수술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애초의 자궁적출 수술을 큰 병원에서 하지 않았던 실책을 다시금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 모친은 방광 안의 결석을 빼낸 후에도 방광에서 소변이 새는 현상 때문에 기저귀를 차고 살아야 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비록 기저귀를 차긴 해도 그런대로 건강하게 생활하시던 모친이 2001년에는 대전성모병원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전3기라고 했다. 이번에는 대전성모병원에서 대장암 수술을 받고 한 달 가까이 병상생활을 했다. 그리고 2년 동안 지속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재발을 막기 위해 꾸준히 약 복용을 해야 했다.
대장암 완치 판정을 받고 몇 년 동안 비교적 건강하게 사셨던 모친은 2009년 6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11월에는 암세포가 전이된 골반의 골절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지경이 됐다. 86세의 노친께는 수술도 항암치료도 가능한 방법이 아니었다. 나는 호스피스 병동의 노친께 내 나름으로 대체의학 방법을 시행했다. 고비를 넘기고 한 달 만에 호스피스병동에서 나오신 노친을 집 근처 요양병원에 모셔놓고 하루 세 번씩 병원을 다니며 대체의학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모친은 말기 폐암도 극복하고, 골반 골절까지 불러일으켰던 전이 암세포도 치유되어 병상생활 8개월만인 2010년 7월 5월 퇴원을 하셨다. 올해 연세 아흔이신 노친은 당신의 두 발로 걷고, 설거지도 거들어주시고 빨래도 하시고 집 안 청소도 하시는 등 건강하게 생활하신다. TV만 보시지 않고 매일 독서를 하시는 노친은 오늘도 내게 '효자' 소리를 듣게 하시지만, 노친의 지난 세월의 그 모진 병상 고통들은 내 무지와 미욱함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아들 녀석이 겪은 두 번의 수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