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의 사회적 전용은 가능하다

[주장] 연기금은 개인의 노후 종잣돈이 아니다

등록 2013.02.19 17:07수정 2013.02.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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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금의 재원확보 방안과 관련된 논의가 식을 줄 모른다. 여론은 확인되지도 않은 인수위의 각종 '안(案)'에 들썩이며 국민연금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전전긍긍하고 있고, 최근에는 국민연금 폐지를 주장하는 무분별한 '괴담'까지 재현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불신이 진보-보수라는 이념적 소속과 무관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연기금을 기초연금의 재원으로 사용하여 노인이라는 사회적 약자가 겪고 있는 빈곤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언뜻 봐도 진보적 가치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간 사회정의를 부르짖던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진보적 처방에 반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원론적인 수준에서 명확하게 소유관계가 설정된 연기금을 기초연금재원으로 전용하려는 '꼼수'를 부려서는 안 되며, 증세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장의 증세가 요원한 상태에서 원론적인 차원에서 시비를 가리며 연기금 활용을 반대하는 것이 죽어가는 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앞선다.

더구나 이러한 냉정한 원론적 처사의 전제가 애시 당초 그릇된 것이었다면, 즉 연기금이 내 소유의 돈이 아니었음에도 잘못된 권리를 행사한 것이라면, 이 노인의 죽음은 누가 책임질 것인지 묻고 싶다. 자신의 이해에만 급급하는 진보의 자가당착적 모습을 원론·원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여기에서는 대다수 서민들의 유일한 노후보장수단이라 할 수 있는 국민연금제도에 대한 불신이 야기된 핵심은 연기금을 사적 노후 종잣돈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는 판단 하에, 그러한 인식의 오류를 지적하고, 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사회적' 전용 가능성에 대해 검토하였다

연기금과 급여 간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연기금의 일부를 사회적 목적(예 : 기초연금)으로 전용한다고 해도, 원론적으로 추후 수령하게 될 국민연금 급여액은 변하지 않는다. 기금고갈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이는 국민연금급여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급여산식에 포함된 '가입기간'과 '소득수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금의 적립금 규모와 무관하게 이들 요인의 변화가 없을 경우, 개별 가입자가 수령하게 될 급여액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분명한 사실이지만, 지난 2007년의 국민연금 개혁 과정에서 재정안정화를 목적으로 급여산식을 조정하고 급여를 낮춘 바 있어, 연기금과 급여 간의 관계를 전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연기금과 급여 간의 직접적인 공변관계를 주장하며, 지금처럼 사적인 노후자금을 전용하여 가입자의 이익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논리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당시 연기금이 급여의 감소로 이어진 경로에는 '재정안정화론에 입각한 정치적 판단'이라는 매개변인이 개입되어 있다. 그러한 정치적 판단이 어떠하냐에 따라, 급여액은 증감 또는 유지될 가능성이 모두 존재한다. 당시에는 기금고갈론을 필두로 한 재정안정화론자들의 정치적 결정이 반영되어 급여를 낮춘 것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양자 간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다. 따라서 연기금을 기초연금재원으로 활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적인 이익침해' 차원에서 제기되는 최근의 비판들은 원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공적' 연기금을 '사적' 노후 종잣돈으로 치부해선 안 돼

국민연금제도는 가입기간과 소득수준 등을 산입한 급여산식에 따라 산정된 급여를 노후라는 위험이 상존하는 한 지급하는 '확정급여 방식'의 공보험제도이다. 이 방식 하에서 평균수명 이상을 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신이 보험료로 낸 총액과 무관하게, 평균적으로 2배 이상의 연금을 수령하게 되어 있어, 실제 자신이 낸 돈과 받아가는 돈 간의 관계가 다소 불분명해진다.

이는 '연기금을 사적으로 축적한 노후 종잣돈'으로 상정할 경우, 즉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의 보험수리원리 하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국민연금만의 '사회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수익비 특혜(?)'는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높아진다. 이는 곧 고소득층보다 저소득층이 유리한 재분배적 요소가 제도 내에 반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급여산식 상에 균등부문(A값)을 일정 비율 반영함으로써, 평균소득 이하의 사람들의 실제 소득보다 높은 수준에서 급여를 산정해준다.

민간보험에서는 이러한 재분배적 요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 국민연금과 관련하여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내뱉는 말 그대로 '내 돈을 남에게 주는 패륜(?)'을 어떤 민간보험 가입자가 납득하겠는가? 하지만 공보험인 국민연금제도에서는 근로시기의 불평등이 노후로 전이되는 것을 조금이나마 방지하고자 이러한 재분배적 요소를 제도 내에 산입했고, 이 역시 공적 연금제도에서만 가능한 '사회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사회적 특성은 노후라는 위험의 발생기간과 강도가 개인마다 상이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를 모두 포괄할 수 있도록 제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다. 만약 보험료(연기금)와 급여 간 명확한 상관관계가 성립하도록 제도를 만들었다면, 이러한 '무덤까지' 국가가 국민을 책임지는 관대한 보험제도는 운영되기 어렵다.

즉, 국민연금제도가 내가 낸 돈을 국가가 대신 운용하여 "원금 + 수익금"을 토대로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면, 보험수리 원칙이 작동하여 지금의 불평·불만은 일면 타당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엄격한 '기여-급여 간 상관관계'에 입각하여, 개인별 "원금 + 수익금" 한도 내에서 연금화(annutization)된 급여를 한정된 기간 동안 지급한다는 점에서 큰 맹점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근로시기에 노후를 위해 축적한 원금과 수익금만으로 노후를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예상보다 오래 살거나, 기금운용 수익이 마이너스가 될 경우)에서는 적절한 노후보장을 제공하기 어렵다. 이들은 대개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보험이나, 확정기여-적립식 연금제도를 운영하는 국가에서 확인되는 '덜 재분배적이고', '덜 관대한' 연금제도 형태이다.

국민연금은 이러한 보험수리원리 또는 확정기여 방식의 맹점을 타개하고, 보다 재분배적이고 관대한 노후보장체계를 구축하고자 마련된 제도이다. 즉, 노후라는 인류 보편의 위험이 상존하는 한 국가가 이를 보장하기 위해 '기여와 급여 간 느슨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국민연금제도는 노후라는 사회적 위험을 국가가 책임지기 위해 개별 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보다 많은 것을 제공하는 '사회적' 특성을 내재하고 있다. 국민연금제도에 가입한 사람들은 누구나 이러한 사회적 급부(benefit)를 국가로부터 제공받는다는 말이다.

물론 그러한 특혜(?)는 개인이 낸 보험료에서 전적으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제도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지금처럼 자기이해(interests)에만 충실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받는 특혜에는 눈 감고, "공적"으로 축적된 연기금을 "사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 또는 몰염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연기금의 '사적' 전용은 불가하지만, '사회적' 전용은 가능하다

현재 연기금의 전용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국민들의 우려는 국민연금의 지난 역사를 고려할 때, 일면 합리적인 행동처럼 보일 수 있다. 최초의 국민복지연금이 중화학 공업 육성이라는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내자동원 수단으로 시도된 바 있고, 국민연금이 탄생한 이후에도 '공공자금관리기금법' 등을 통해 국가가 무분별하게 전용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국가가 국민적 공감대 형성 없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에만 부합하는 방식으로 연기금을 '사적'으로 전용하는 일은 있어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적' 전용에 대한 비판을 '사회적' 전용이 함께 뒤집어쓸 이유는 없다. 국민연금제도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연기금의 사회적 전용의 '순기능'은 사적 전용의 '역기능'과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제도는 차후 부과방식으로의 전환을 상정하고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단순히 연기금을 보유하거나 운용수익을 증대시키는 것만으로는 그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

단적인 예로 지금 제기되는 주장처럼 연기금이 기초연금 재원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아내거나 운용수익을 극대화한다면, 연기금이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전 국민의 노후를 지속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은데, 이는 다음의 이유에서이다.

지금 연기금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기금고갈 시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연기금을 기초연금재원으로 사용하면, 기금고갈 시기를 앞당겨서 국민연금제도를 더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하지만 지난 2007년 연금재정을 안정화시키고 기금고갈 시점을 연기하기 위한 개혁이 이미 이루어진 바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 소득대체율을 2028년까지 기존 60%에서 40%로 낮추는 축소개혁을 통해 기금고갈시점을 약 15년 정도 연장한 바 있다.

이러한 개혁을 추진한 목적에 따른다면, 지금 우리는 연기금 고갈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하다. 지금 당장은 안정화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레 기금고갈 논란이 다시 대두되기 마련이다. 이는 결국 국민연금제도에 있어 연기금 고갈은 본래부터 해결될 수 없는, 보다 거칠게 표현하면 '문제'로 상정될 가치조차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기금고갈시점을 연장하는 것이 제도의 존속과 무관한 것처럼, 연기금의 일부를 기초연금과 같은 사회적 목적으로 전용함으로써 기금고갈시점이 앞당겨 지는 것 역시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금과 같이 경제적 수익 원리에 따라 막대한 연기금을 보유하고 주식·채권 투자에 집중할 경우, 향후 급여지출 증대로 인한 (자연스러운) 기금 소진 과정에서 일거에 대량의 현금유동화 유인이 생김으로써, 엄청난 시장교란 및 사회적 파장을 초래할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보험수리적 또는 경제수익적 논리에서 벗어나, 보다 공익에 부합하고, 제도의 지속가능성에 기여하는 방안으로 연기금의 '사회적 전용'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전술한 것처럼 우리나라와 같은 확정급여방식(차후 부과방식으로의 전환 상정) 공적연금제도를 운영할 시, 기금여부 또는 규모가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단일한 요인이 되진 않는다. 현재 기금이 없거나 소규모 기금만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같은 방식의 연금제도를 운영하는 선진 복지국가들의 사례는 이를 방증한다.

그보다는 향후의 인구구조, 노동시장구조, 생산성 등의 요인들이 기여기반(contribution base)을 유지ㆍ확대하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국민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다. 즉, 인구구조를 젊게 만든다거나, 기여능력을 갖춘 노동인구를 늘린다거나, 노인부양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국가의 생산성을 증대시킴으로써, 연금재정의 '수입(기여)-지출(급여)' 간 격차를 줄일 수 있고,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경직성과 보수성을 특징으로 하는 국내 재정환경을 고려한다면, 연기금의 사회적 전용은 위 요인들을 순방향으로 자극하는 주요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연기금 재원의 일부를 활용하여 보육서비스나 교육·훈련 등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확충할 경우, 여성, 청년, 노인 등의 고용률 증가와 기여기반의 확대로 이어져 국민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전용에 대해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임시변통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하지만 전술한 것처럼 인구구조, 노동시장, 생산성 등과 관련된 당장의 사회적 욕구들은 넓은 의미에서 국민연금제도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따라서 '윗돌을 굄으로써, 아랫돌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해주는' 사전적 처방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연기금의 기초연금 재원 활용 역시 '사회적 전용'의 일종

최근 제기되고 있는 연기금의 기초연금재원 활용 역시, 일종의 '사회적 전용'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공적연금제도는 노후라는 인류 보편의 사회적 위험에 대해 국가가 공적개입을 통해 대응하고자 마련된 조치이다. 부모-자식 간의 사적인 상호 부양체계가 붕괴된 산업사회의 맥락에서, 노인에 대한 부양은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 이미 서구 선진국들의 합의가 형성된 바 있고, 이에 전 세계 170여 개의 국가에서 공적연금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민연금제도 역시, 이러한 시대적 합의에 뒤늦게나마 동조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1988년 제도도입 당시의 노인들을 원천적으로 배제한 바 있다. 이들은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주역임에도, 그러한 산업화의 부산물로 탄생한 공적연금제도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OECD에서 가장 높은 노인 빈곤율이라는 치욕스러운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인빈곤 문제는 현세대는 물론, 후세대와 미래의 노후보장체계에 잠재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기금의 사회적 전용을 통해 사전적으로 대응해나갈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제도 본연의 목적이 '노후소득보장'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러한 전용은 하등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급부대상을 제도 가입자에서 (비가입자를 포함한) 전체 노인으로 확대한다는 이유로 형평성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연기금이 개인의 노후자금에 불과하다는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근시안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오류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연기금을 노인빈곤 예방이라는 사회적 용도로 전용할 경우 제도 가입자들이 잃게 될 '기회비용'과 당장의 노인문제를 방치함으로써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 간 경중만 따져 봐도 답은 쉽게 도출할 수 있다.

요는 노인빈곤 문제에 사전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고, 노후보장체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데 있어, 연기금의 '고수(固守)'보다는 사회적 전용을 통한 대응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국민연금 #기초연금 #연기금 #국민연금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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