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양동 통샘마을 벽화 골목길.
이주빈
그이의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여전히 가파르고 좁았다. 앞서 걷는 그는 낮술에 취했는지 허위허위 손짓을 섞어가며 사설인지 노래인지 구분이 안 가는 가락을 탔다. 도시에서 제일 먼저 달과 만나서 '달동네'라던가. 흐린 하늘에 낮달이 떴다.
흔히 달동네라고 불리는 '도시 저소득층 집단밀집 주거지역'은 일제 강점기가 시초다. 일제의 수탈을 피해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이들이 주인 없는 산비탈이나 개천가에 허가 받지 않고 집을 짓고 살았다. 이를 '토막민촌'이라 했다.
토막민촌의 뒤를 잇는 것이 이른바 '판자촌'이다. 해방 이후엔 전재민(戰災民)들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피난민들이 주로 판자촌에 모여 살았다. 또 1945년 '농지개혁법' 시행으로 농촌의 지주층이 도시로 옮겨오면서 이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준 저소득층 주민들이 판자촌으로 옮겨가 살기도 했다.
달동네(산동네)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들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른바 산업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이농향도(離農向都)' 현상이 원인이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 당시 도시인구는 연간 4.5%∼7.2%씩 증가했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방치된 국·공유지에 무허가 정착촌을 형성하거나 도심 외곽지역의 산등성이에 '달동네'를 만들어 살았다.
광주에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달동네가 있다. 열 댓 곳이 넘던 광주의 달동네는 '재개발' 사업으로 이젠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하지만 광주천을 따라 걷다 보면 그나마 터를 유지하는 달동네 두 곳을 연이어 만날 수 있다. 양동 통샘마을과 발산마을이다.
사이좋은 남매처럼 나란히 자리잡은 달동네 두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