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의 국회 본회의장 의원석.
남소연
날카로운 고등학생들, 낯 뜨거운 교사과연 고등학생들의 해석은 분명했고, 지적은 날카로웠다. 교사로서 낯 뜨겁게 고백하건대,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 학교 또한 삼성이 지배하는 현실에 순응하고 발 빠르게 대처하는 '인재'를 길러내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서열화 된 학벌구조를 욕하지만, 정작 제자들 서울대 못 보내 안달하는 곳이 학교인 것처럼.
아무리 삼성을 욕하고 불매운동을 벌이면 뭐하나. 누구 한 명이라도 삼성에 취직이라도 할라치면, 삼성이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학교가 알아서 교문에 경축 현수막을 내거는 게 현실이니. 그런 환경에서 자란 일부 아이들은 삼성이라는 이름에서 애국심이 느껴지기까지 한단다. 해외여행 중 삼성 광고판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영국 축구클럽 첼시 팀을 응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그야말로 '삼성 키즈'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총명한 아이들 대부분이 '삼성이 부도덕한 기업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성만의 문제도 아닐뿐더러, 일개 기업을 탓하기보다 성숙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구조에 큰 책임이 있다며 삼성을 두둔하는 아이도 있고, 심지어 현실과 이상을 구분해야 한다면서, 지금 당장 삼성과 맞서 싸우는 건 몽상가나 할 짓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차피 돈이 막강한 검찰 권력까지 쥐고 흔드는 판에, '독야청청'하겠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거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불법적으로 도청을 시도한 사람이나, 그 사실을 인터넷에 올린 의원이나 현실을 무시한 '돈키호테'라며 조롱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순수한 우리 아이들이 이렇듯 닳을 대로 닳아버렸다. 대법원은 이런 현실을 과연 알기나 할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겠어"
퇴근하는 길, 착잡한 마음에 소주나 한 잔 할 요량으로 선술집에 들렀다. 그곳에선 불콰해진 얼굴의 중년 신사들 서너 명이 청문회를 앞둔 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의 면면을 안주 삼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의혹에다 자녀들의 병역 기피에 이르기까지 고위공직자가 되기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도덕적 결함들이 한창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듣자니까 되레 그들을 두둔하는 듯한 얘기들이 더 많았다.
"저 나이 되도록 티끌 없이 살기는 쉽진 않았을 거야. 아쉽긴 해도, 이제 그만하고 통과시켜줬으면 싶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어디 있겠어.""괜히 새 정부 출범하는 데 발목잡기라며 역풍이 불까 싶어. 좋은 약도 지나치면 해가 되듯이 사람들에게 몽니부리는 것처럼 비쳐 좋을 것 없잖아.""아무렴 MB 정권의 고위공직자들만 하겠어?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그나마 양반들이지, 뭘."청문회에 나오는 후보자들마다 예외 없이 등장하는 단골 메뉴인 까닭에 익숙해진 탓일까. 이제는 그들의 웬만한 결함에는 우리 국민 모두가 무덤덤해질 지경이 되었다. 기성세대는 물론,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도덕 기준마저도 시나브로 허물어뜨린 것이다. 말하자면, MB의 당선 이후 흐트러진 우리 사회의 도덕 기준이 차기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기대치를 더욱 낮춰버렸다고나 할까.
노회찬 의원이 의원직을 잃은 것에 대해서, 또 대법원의 유죄 판결이 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솔직히 별 관심이 없다.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이자 초등학생 아이를 둔 아빠로서 상식에 반하는 이번 판결이 미래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법과 정의에 대해 비뚤어진 의식을 갖게 만들까봐, 단지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초등학생 아이가 내게 던진 마지막 질문을 대법원 재판관들에게 그대로 던지고 싶다. "누가 더 나쁜 거야?" 초등학생 아이의 상식조차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을 '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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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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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노회찬의 가장 큰 죄가 뭔 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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