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정자가 석서정. 가운데 있는 다리가 광주교다. 광주교를 건너면 금남로와는 불과 300미터. 광주공원에서 사격훈련을 마친 시민군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 다리를 넘었을까.
이주빈
광주천을 가로지르는 광주교를 건너 광주공원으로 향한다. 갈마드는 상념에 걸음은 더욱 느려진다. 바람이 차서가 아니다. 다리를 오갔을 사람과 사람, 사연과 사연의 엇갈림이 시려서다.
광주공원은 1913년 일제에 의해 '지정'된 광주 최초의 도시공원이다. '도시공원'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엽 '근대(modern)'와 함께 등장했다. 광주공원이 조성될 무렵에 만들어진 아시아의 도시공원은 상하이 황푸공원(1886년), 인천 만국공원(1888년, 지금의 자유공원), 서울 탑골공원(1897년), 도쿄 히비야공원(1903년) 등이 있다.
중국과 조선 등 아시아에서 근대식 도시공원은 서구 열강의 진출과 때를 같이 한다. 황푸공원과 만국공원, 탑골공원의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공공 공원(public park)이라는 형식을 띠었지만 철저히 서구 열강의 힘을 과시하는 서양 근대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주공원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통치하는 '식민지 근대'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광주공원이 조성된 자리는 성거산 일대. 지금이야 사통팔달 길이 열려있어 광주를 드나드는 길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엔 목포나 영산포 등지에서 광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성거산을 거쳐야 했다. 성거산에 도착했다고 해도 광주 시내로 바로 들어오기란 쉽지 않았다. 광주천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일제는 성거산에서 광주 시내로 쉽게 들어갈 요량으로 목교를 가설한다. 그 나무다리가 지금 광주교의 시작이다. 그리고 '조선 정기 말살'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성거산 머리 부분엔 '성거사'라고 하는 오래된 절터가 있었다. 일제는 이 절터에 1908년 한말 의병전쟁 때 죽은 일제 군경과 일제에 부역한 조선인들의 명복을 빈다며 '전남 충혼탑'을 세웠다. 광주 초입에 들어오는 이들은 쉽게 이 탑을 올려볼 수 있는 위치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곤조(根性)'다.
1913년 성거산 일대를 광주공원으로 지정한 일제는 1914년엔 신사(神社)도 지었다. 광주신사는 목포 송도신사, 장성신사와 함께 전남지역 3대 신사로 불렸는데 그 현판을 조선주둔군 초대사령관이자 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가 썼다. 광주신사는 해방되던 날 광주서중 학생들에 의해 허물어졌다. 신사가 무너진 자리에 다시 충혼탑이 세워졌다. 한국전쟁 중에 사망한 군인과 경찰의 혼을 기리는 탑이다.
신사가 무너진 자리에 다시 충혼탑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