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을 지켜주세요
노순택
지난여름, 저는 왜 불볕이 이글대는 가운데 며칠씩이나 제주 땅을 걸었던 걸까요? 사람들이 너나없이 다녀와서 영혼의 씻김을 받았다는 올레길도 아니고, 하필이면 숨이 턱턱 막히도록 지열이 들끓던 아스팔트 길 위로만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던 걸까요? 얼굴과 팔뚝, 종아리가 벌겋게 익도록 걸어가며 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삼춘들, 강정에서 왔수다. 우리 강정을 살려 줍서."시가지에 들어설 때마다 행진 대열을 이끄는 차량에서 마이크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해군기지가 들어설 강정마을을 살려 달라는 간절한 외침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거리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지요. '왜 하필 삼춘들에게만 호소를 하는 걸까? 아주머니들도 있을 텐데……' 하는 의문과 함께, 제주는 아직 여자보다는 남자를 앞세우는 가부장적인 의식이 남아 있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야 제주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어른들을 그냥 삼춘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만큼 저는 제주에 대해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강정에 대해 아는 건 또 얼마나 될까요? 행진을 하는 동안 흥을 돋우기 위해 트럭에서 틀어준 노래 중에 다음과 같은 가사로 된 게 있었어요.
"강정 먹고 싶거들랑 슈퍼에 가서 땅콩강정 깨강정 사다줄 테니 제주도에 하나밖에 없는 강정 달라고 오도방정 떨지 말고 깨강정 쳐드삼. 미국에도 보내줄게 땅콩강정 깨강정, 청와대에도 보내줄게 땅콩강정 깨강정~." 하도 여러 번 틀어주고, 가사가 재미있어서 같이 따라 부르며 걷곤 했지요. 저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정이라고 하면 땅콩강정과 깨강정을 떠올리는 딱 그 수준이었어요. 몇 년 동안이나 강정이라는 마을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걸 안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제게 어느 날 붉은발말똥게가 기어왔어요. 연산호가 안겨 오고, 구럼비 바위가 눈앞에 누워 있더군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들 앞에서 당혹감을 느껴야 했지요. 그제야 강정마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진실을 알게 됐지요. 하지만 그게 이곳 경기도 부천 땅에 사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지? 하고 돌아서면 그만일 수도 있었어요. 나도 내 할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세상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외면하고 사는 게 신상에 편하다는 걸 알 만큼 나이도 먹었고요.
하지만 애초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기 시작하자 마음이 불편해지더군요. 나 몰라라 하고 가만히 있는 게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했지요. 그런 마음이 결국 지난겨울에 작가들끼리 임진각에서 강정까지 이어지는 릴레이 걷기를 하는 데 참여하도록 하더니, 이번 여름에는 제주도로 내려가게 만들더군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비록 그냥 걷는 일뿐일지라도 그렇게나마 강정마을 삼춘들의 아픔에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주고 싶었습니다. 명색이 시인이라는 자가 입으로만 생명과 평화를 떠드는 것이야말로 위선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제주에서 돌아와서도 강정은 여전히 제 가슴에 묵직한 돌로 얹혀 있습니다. 며칠간 땡볕에 그을렸던 자국은 이제 희미해졌지만, 강정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희미해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도 공사장 입구에서 차량을 저지하느라 맨몸으로 드러눕고 끌려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무엇을 더 얻자는 싸움이 아닙니다. 생명과 평화를 지키자는 싸움입니다. 삶의 터전이자 제주 할망의 숨이 깃든 구럼비를 살려내자는 싸움입니다. 이 숭고한 싸움을 위해 이곳 경기도 부천 땅에서 이름 없는 시인이 간절한 외침을 담아 보내 드립니다.
"제주 사는 삼춘들, 강정을 살려줍서. 구럼비를 살려줍서. 붉은발말똥게를 살려줍서. 연산호를 살려줍서. 돌고래를 살려줍서. 살려줍서. 살려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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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춘들 강정서 왔수다, 우리 강정 살려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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