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김용준 인수위원장이 25일 오후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경제1분과 업무보고를 받기위해 들어서는 박근혜 당선인을 마중나와 있다.
인수위사진기자단
김현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박 당선인은 절대로 2인자를 두지 않는 정치 스타일을 견지하셨던 분"이라며 "결국 아무도 믿지 못하는 박 당선인은 소수 최측근을 기반으로 내가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것을 웅변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김 대변인은 "박근혜 당선인의 아버지 시대 정치가 자꾸 떠오른다"며 "YS 문민정부 이후 단 한번도 장관급으로 격상된 바 없는 경호실을 15년 만에 장관급으로 끌어올린 것도 단순히 '커터칼 테러' 때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우려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잘 짚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그리고 김용준 총리 후보자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이기도 합니다.
국민과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지탄을 받아도 박 당선인의 언질이 없다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엄청난 흠결에도 불구하고 박 당선인에 대한 충성심만 있다면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새 정부를 구성할 주요 인사들이라는 게 우리 국민들의 불행인 것일까요?
박 당선인이 이런 분들과 함께 하겠다고 외쳤던 구호가 '시대교체' '정치교체'라는 데서는 혀를 차게 됩니다. 그가 국민들 앞에서 새로운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면서 약속한 '정치교체' '시대교체'의 아이콘은 누구일까요?
여기까지 이르면 박 당선인의 새로운 정치가 자꾸 박정희 제3공화국과 오버랩 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고해볼까요?
제3공화국은 5·16 군사쿠데타세력이 민간인 신분으로 옷을 갈아입고 4월 혁명의 민족민주 이념에 역행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남북 간 군사대결과 체제경쟁을 벌이면서 동시에 정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외자의존적 경제개발을 추진해나갔습니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려고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한일회담을 추진했고, 1965년 8월에는 위수령 발동이라는 강압책으로 반대세력을 억눌러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비준시켰지요.
그뿐입니까. 베트남 파병을 단행해서 우리 젊은이들을 희생시켰고, 1969년 9월엔 공화당 의원만으로 새벽에 국회 제3별관에서 3선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켜 1971년 가까스로 재집권에 성공했지요. 결국 박정희정권 내내 4월 혁명의 이념을 계승한 한일회담 반대투쟁·부정선거 규탄투쟁·3선개헌 반대투쟁 등이 치열하게 전개됐고, 70년대 초에는 전태일 열사 분신 자살사건 등 폭발적인 민중항쟁이 전개됐습니다.
물론 '잘 살아보세' 구호로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이뤘습니다. 1~2차 경제개발계획은 성공을 거뒀지요. 그럼 된 것일까요? 제3공화국도 1960년대 말부터는 외채 급증에, 무역적자 확대에, 차관기업의 독과점화, 중소기업 위축, 인플레이션 같은 예속독점자본주의의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었습니다.
시대도 많이 바뀌었고, 정치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절대로 제3공화국처럼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첫발을 내딛는 박근혜 정부가 자꾸 정치 시계를 과거로 돌리려고 하고, 부정비리가 많은 구태 인사들을 등용하면서 정치교체와 시대교체를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일 테니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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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여왕조시대 훌륭한 영의정 깜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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